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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기 좋은 날씨다. 하늘도 파랗고 날씨도 제법 선선해졌다. 모처럼 자전거를 꺼내 한강변을 달린다. 페달을 밟으며 상쾌한 맞바람을 즐기는 것도 잠시, 곧 쩌렁쩌렁한 트로트 음악이 귀를 때린다. 자전거에 달린 스피커로 자신의 애청곡을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는 아저씨 라이더들 되시겠다. 등산하다가 스피커족을 만나면 더 난감하다. 당사자에게는 아름다운 음악일지 모르겠으나, 원치 않는 청중으로 포획된 주변 사람들은 이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음악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앉아서 쉬든지, 아니면 빠른 발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스피커를 뺏어 내동댕이치는 방법도 있지만 다른 종류의 더 큰 소음이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지 않다.

누구에게는 음악이 누구에게는 소음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시비가 생긴다.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까지 벌어지는 현실이다. 사람들이 특별히 민감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소음의 편재’로 인해 소음에 대한 사회적 저항성이 더 낮아졌다고 보는 편이 옳다. 지하철을 타면 심심찮게 야구중계나 게임 효과음이 들리고, 택시를 타면 한꺼번에 두세 개 틀어놓은 내비게이터 안내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대학교 앞에서는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소리가 휴대용 앰프를 통해 우렁차게 울려대고, 집 앞 골목에서는 신선한 과일이 왔다거나 안 쓰는 전자제품을 수거한다는 무한반복 녹음 음성이 들려온다. 늦은 저녁 식당에 가면 술기운 탓에 음량 조절이 안되는 손님들이 홀을 채우고 있고, 서둘러 문 밖으로 나가면 헤드셋을 장착한 내레이터 모델들이 새로 나온 화장품을 무료로 써보시라고 외치고 있다.

소음이 개인적 불쾌감의 수준을 넘어 사회적 생산성을 저해하는 이유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소음은 당연히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잉여성’을 강화한다. 정보이론의 정전으로 불리는 클로드 섀넌의 <커뮤니케이션의 수학적 이론> 내용의 일부이다. 전화할 때 주위가 시끄럽거나(환경적 잡음) 통신상태가 불량해서(기계적 잡음)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면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의미 전달을 확인할 수 있고, 딴생각에 잠겨 강의를 건성으로 듣는(심리적 잡음) 학생에게는 소리를 질러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 다시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할 수 있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이라면 잉여성은 필요하지 않다. 일상적 대화에서도 잉여성은 50% 정도라고 한다. 시끄러운 술집에서 “뭐라고?”와 “못 들었어?”를 반복하는 이들의 대화에서는 잉여성이 80%쯤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 간의 대화만이 아니다. 집단이나 조직 간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소음은 존재하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집단적 잉여성이 작동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의 일상에서 소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휴가 때 조용한 산사나 숲을 찾아 단 며칠이라도 생소한 적막의 안온함을 느껴보는 것이 고작이다. 아니면 소음으로 소음을 이기는 방법이 있다. 소위 ‘백색소음’이라 불리는 편안한 소음에 귀를 맡기는 것이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낙엽 밟는 소리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심리적 안정을 위한 갖가지 소음들, 이를테면 귀를 후비는 소리, 도란도란 잡담 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 등을 모아 녹음한 일명 ‘ASMR’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종일 불쾌한 소음에 시달린 나의 귀를 위해 잠자리에 누워 누군가의 귀 후비는 소리를 듣는 현실이야말로 소음 편재의 시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개인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의 건전한 생산성을 위해서라도 도시의 일상에서 소음이 줄어들기를 기대한다. 아마도 적절한 법적, 제도적 보완도 필요할 것이다. 건축 승인을 위한 기준이 65㏈(데시벨)이지만 실제로는 80㏈이 넘는 아파트가 여전히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모든 소리가 청각 공해일 수 있다는 공감대부터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남들보다 소리가 커야 한다는 강박이 없어지기를 기대한다.

르네상스 이후 글과 책, 그리고 문자적 이성이 인간 생활을 지배했다면, 21세기에는 영상과 소리, 그리고 직관적 통찰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교과서 대신 테드(TED) 강의를, 백과사전 대신 유튜브를 보고, 음성비서 기기들을 집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차를 타면 내비게이터 소리를 듣는 것이 어색하지 않듯이, 곧 가정 내에서는 ‘아마존 알렉사’나 ‘구글 어시스턴트’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점점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귀가 쉴 시간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각자 조금씩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의 집단적 불쾌지수는,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잉여성’ 지수는 쭉쭉 올라가 하늘을 찌를지도 모를 일이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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