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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유모차가 살구나무 아래 서 있구요

지팡이와 털신이 뜰팡에 기대어 있습니다

살구가 한 소쿠리 담겼구요

처마 아래 신문지와 골판지가 쌓였습니다

 

살구를 소쿠리에 담아 샘에서 씻은 유모차가

천천히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앉습니다

깡마른 두 발이 문턱을 먼저 넘어오고

이어서 무릎걸음으로 퀭한 얼굴이 밖으로 나옵니다

좀 잡숴봐, 이래 봬두 달아

 

살구꽃이 피었다 지고 풋살구가 열리고

연두에서 노랑으로 익어가는 동안

낙상이 있었고

119구급차가 두어 번 다녀갔지만

그런대로 아직은 지낼 만합니다

송진권(1970~)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머니는 몸이 불편해 유모차를 밀고 다닌다. 헐고 너절하게 된 유모차는 늘 살구나무 아래에 서 있어서, 살구나무에 꽃이 오고 풋살구가 열리고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생긴 건 곱지 않아도 맛이 잘 든 살구를 나눠 먹으려고 맑고 푸르고 차가운 샘물에 갓 딴 살구를 씻어서 툇마루에 앉는다. 비록 살구꽃이 오고 가고, 푸른 풋살구가 매달리고, 살구가 여무는 동안 넘어져 다친 일이 있었고, 또 위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지만. 송진권 시인은 시 ‘느티나무슈퍼’에서 “느티나무슈퍼에 가면 안채에서 말매미만큼 늙은 할머니가 나와/ 달팽이자물쇠를 풀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지요”라고 썼는데, 이 시를 읽으니 이 시의 안채에서 고향집 어머니가 퀭한 얼굴로 바깥으로 나오신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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