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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박근혜 정부를 일컬어 ‘유신독재’의 부활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원성이 드높지만, 정작 책임자로 지목받고 있는 대통령은 묵묵부답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실마리는 지난 18일 새해 예산안과 관련해 국회에서 있었던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에 담겨 있다. 교착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해법을 요구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런 기대를 배반하며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정치의 중심은 국회”라고 못 박았다. 국회에서 합의하면 자신은 기꺼이 수용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대체 이 상황은 무엇일까. 박 대통령은 자신의 책임을 국회에 전가해버린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정연설의 의도라기보다 이렇게 행정부의 수반이 정치적 문제를 회피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제지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말한 내용은 교과서에 나오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삼권분립에 근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외에 뾰족한 방법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최소한 시정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의회정치를 인정하고 있다. 의회정치에서 논의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태도는 과거 그의 아버지와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의회정치를 혐오했고, 정치인들을 ‘쓰레기’에 비유했다. 그에게 정치는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소음이나 병균에 지나지 않았다. 최소한 이런 맥락에서 시정연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박 대통령의 인식은 의회정치와 시장주의를 중심 가치로 받아들인 ‘포스트 박정희’ 시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혈연 관계로 박근혜와 박정희를 엮어서 ‘유신독재’의 범주로 묶어내는 것은 그렇게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는 뜻이다.

의회정치에 대한 박 대통령의 발언은 40%를 웃도는 공고한 국민의 지지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하락하더라도 그 아래로 지지율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런 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의회정치를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독일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독재론’에서 독재를 민주주의와 대립시켜서 파악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슈미트는 나치에 가입해서 히틀러의 총통제를 정당화하는 법적 논리를 개발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부르주아 정치사상을 통해 절대화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 따른 것이었다.

 

(경향DB)

민주적 헌법은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을 독재로 규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민주적 헌법이라도 그 내적 논리에서 ‘예외상태’를 염두에 둔다는 게 슈미트의 주장인데,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슈미트는 독재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모든 독재는 독재자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 이처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민주적 헌법의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요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민주화 이후의 권위주의’라는 개념도 이런 슈미트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을 가진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급진적 성찰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슈미트의 ‘독재론’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단초를 제공한다. 슈미트의 논리에 근거하면, 박근혜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저버린다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군사독재 이후 미국을 통해 유입된 ‘민주적 자본주의’를 신봉해왔던 한국의 파워엘리트들이 결과적으로 봉착하게 된 것이 박근혜 정부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슈미트가 규정하듯이, 모든 독재는 어디까지나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예외적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원리에서 독재는 예외성을 띠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위반할 수 있는 예외성을 권력에 부여해도 괜찮다는 것이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 40%의 합의일 것이다. 이 국민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정치는 의회에서나 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지,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다. 이 모든 사태는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민주주의를 통해 실제 행해지는 것은 독재의 예외성이다. 모든 정치를 의회정치의 표로 둔갑시켜버린 이른바 ‘민주화’의 과정이 이런 파국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파국의 책임은 온전히 ‘진보진영’이라고 자칭 타칭 호명되어온 이들에게 있는 것이지 실질적인 정치의 주인공들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박근혜 정부는 과거로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갈 곳이 없는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징후이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배제해버렸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명확해질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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