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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남들이 우리를 ‘백의민족’이라고 부른 이유는 우리가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했기 때문이란다. 중국 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부여는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널리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1세기부터 300년간 존속한 부여 사람들이 백의를 입었다니, 그 역사가 굉장히 오래됐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진짜로 흰옷을 좋아했는지는 의문이다. 흰옷은 때를 잘 타고 오래 입으면 누렇게 변색된다. 또한 더 살이 쪄 보이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어둡게 보이는 단점도 있다. 흰옷을 입었던 것은 염색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탓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제기됐다. 사극을 보면 못사는 사람들은 흰옷을 입지만, 양반들은 죄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좋아한 색깔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로 붉은색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의주로 피란하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곽재우는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함안군을 수복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려 훈장을 받는다. 그는 싸울 때 늘 붉은 옷을 입고 선봉에 섰기에 사람들은 그를 ‘홍의장군’이라고 불렀다.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영조대왕의 어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왕들이 입은 옷은 모두 붉은색이었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에서 ‘단심’이란 ‘붉은 마음’을 뜻한다. 이렇게 붉은색을 좋아했기에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만들 때 빨간색이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붉은악마들이 다양한 복장과 분장을 한 채 응원을 하고 있다. I 출처:경향DB

붉은색에 대한 선호는 축구대표팀의 유니폼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축구팀의 사진을 보면 상의와 스타킹이 붉은색이다. 제14회 런던올림픽은 정부 수립 후 국가를 대표해 외국에 가는 첫 번째 행사였는데, 우리가 정말 흰색을 좋아했다면 이런 유니폼을 입었겠는가? 심지어 1980년대부터는 상의와 하의 모두 붉은색을 입게 되는데, 우리 대표팀이 4위를 차지한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는 우리가 붉은색을 좋아한다는 걸 전 세계에 알린 계기였다. 그 후 유니폼의 색조는 조금씩 변하지만, 4강 신화를 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상의든 하의든 유니폼의 붉은색은 여전히 유지됐다.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모임인 ‘붉은 악마’도 붉은색 티셔츠를 입었기에 그때 우리나라는 국토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12년 초,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온갖 악행을 떠안고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엔 무리가 있다는, 그들답지 않은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문제는 원래 파란색이던 로고였다. 파란색은 친근감을 불러일으켜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이 상징으로 채택하고 있는데, 어느덧 보수의 상징이 돼버린 파란색을 버리는 건 그들로선 아까운 일이었으리라. 결국 새누리당 로고는 그릇 모양의 빨간색으로 정해졌다. 빨간색은 상대에게 공격성을 불러일으킨다는 분석도 있지만, 우리 민족이 예부터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걸 간파한 거였다. 자기들이 그렇게 싫어 하는 북한이 빨간색을 상징색으로 쓴다는 것도, 자기들이 정적을 탄압할 때 ‘빨갱이’란 딱지를 붙여왔던 전력도 개의치 않았다. 그 전략은 적중했다. 붉은색에 대한 우리 민족의 선호는 불법사찰 등 현 정권이 저지른 일들에 눈을 감고 맹목적 지지를 하게끔 만들었다. 4월11일, 새누리당은 수도권과 호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승리하면서 2002년 이후 10년 만에 전국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평소 ‘색깔론’을 당의 주요 전략으로 쓸 정도로 색채감각이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통이라는 건 쉽게 바뀌지 않으니, 다가오는 대선에서도 새누리당의 붉은색은 나름의 위력을 떨칠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노란색이나 통합진보당의 보라색으로 여기에 맞서는 건 어려워 보인다. 정권이 바뀌려면 400여년 전 이 땅에 나타났던 홍의장군이 재림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가 다시 온다면 어떤 색의 옷을 입고 나타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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