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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좋았던 문학작품은? 나아가 ‘단 한 권의 작품’을 선정한다면? 답변에서 동일한 책을 언급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모든 사람이 소장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읽지 않은 작품은 ‘단 한 권의 책’일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인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것도 일종의 허구이기 쉽다. 왜냐하면 어떤 책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체험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체험의 양태는 독자가 놓인 현실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자신만의 고전 목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거부하는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반복해서 나타나는 어떤 꿈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되는데, 그 꿈은 ‘짐승의 눈, 고깃덩어리, 헛간, 그리고 피웅덩이’ 또는 ‘누군가의 목을 자르고 칼질하는 감각’ 등으로 얼룩진 살육과 육식에 대한 악몽이다.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고기를 멀리하고, 사람들과도 점점 멀어지고, 급기야 폭력적인 아버지의 강요를 거부하다가 자해하기에 이른다. 그녀의 이 고집스러운 채식주의는 ‘보편적 폭력’에 대한 공포와 거부를 의미하지만, 구체적인 폭력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렸을 적,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식구들의 보신으로 희생된 개가 죽어가는 다음과 같은 장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 피가 흘러.”
‘잊을 수 없는 정도로 강력’, ‘미와 공포의 섬뜩함’이라는 맨부커 심사위원장의 심사평이 불현듯, 불편하게 떠오르는 장면이다. ‘강력, 섬뜩, 미와 공포’ 등의 찬사가 붙여졌지만, 한강의 소설은 대개 ‘강력과 섬뜩’에 기대하는 그런 것이 없다. 차라리 읽고 나면, 뚜렷한 서사나 인물 대신 어떤 흐릿한 이미지나, 느낌 같은 것이 남는 그녀의 소설이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과 영국인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_연합뉴스
그녀의 ‘시적’인 문장은 작가처럼, 말수 적고 느리고 서늘하다. 읊조리는 듯한 가냘픈, 꺼지고 사라지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아무도 해치지 않는, 지상과 천상 어디쯤 떠돌고 있을 것 같은, 상처 같은 문장들. 그러나 이 흐릿한 문장들이 모이고 겹쳐서 보여주는 그림은 강력하다. 그것은 이를테면, 베란다에서 식물로 변신한 아내, 상체를 벗어버리고 햇빛을 받고 있는 여자 같은. 그리고 이 이상한 ‘그녀들’의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곧 폭력과 힘, 욕망에 대한 거부이다.
애초에 보편적 문학으로 성립하는 문학은 없다. 문학은 ‘핸드폰’이나 ‘자동차’처럼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소통’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과 명작이란 각자의 독서의 체험에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정전과 같은 것이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듯, 보편적인 독자를 위한 보편적인 문학이란 없다. 그의 말처럼 ‘실재적 독자’를 향한 현실의 어떤 구속과 장애에 대한 자유의 갈망, 그 구체적인 외침이 저 멀리 있는, 미래에 있는 ‘잠재적 독자’에게 가 닿을 수는 있다. 그 과정에서, 그 특정한 주제와 문학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맨부커상 수상은 일종의 그러한 잠재적 독자와의 소통이고, 소통을 통한 의미의 변전과 확장이다. 그렇다면 그들, 서구인들이 읽고, 실재적 독자가 무감했던 것은 무엇일까.
정글 같은 경쟁세계에서 타인을 짓밟고 잡아먹는 식인의 폭력, 자연을 파괴하고 더 넓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대지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인간의 폭력, 수백 명의 아이들을 수장시키고 살균제로 사람들을 죽이는 자본의 탐욕. 한강의 그녀들은 이 세상의 비참과 잔혹이 우리들의 짐승 같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이 부정은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라는 극단적 거식으로 이어진다. 이 끔찍한 수동성과 죽음 충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타인’을 밀쳐내지 않으면 최소한의 생존도 불가능한 지금의 현실에 대한 비유일까? 그녀의 소설의 나무처럼, 햇빛과 물로 최소한 존재하는 무해한 인간이란 불가능한가.
맨부커상 수상 소식에 온 나라가 들썩인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이런 풍경을 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일등에의 욕망, 정상에의 욕망, 자본에의 욕망….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라는 영혜의 말,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드린다”는 작가 수상 소감, 번역자 ‘데보라’에게 ‘울지 말라’고 하던 수묵화 같은 한강의 몸짓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그녀의 소망처럼 한국 사람들이 그녀의 소설을 많이, 천천히, 깊이 읽었으면 좋겠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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