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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 시를 썼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그 무렵 함께 시를 쓰던 사람들 대부분은 여전히 시를 쓰고 있다. 이제 어깨가 처지고 백발이 성성하지만 마음만은 여전한 것 같다. 아니 시인이라면 ‘마음만은 여전하다’는 표현 따위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폭발 가능한 인화물질이고 언제 어디로 우주 저편으로 가버릴지, 스스로 새로운 우주가 될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얼마 전에 그 시인 가운데 한 사람, 단단하기가 대못 같던 선배를 만났다. 30대 중반 무렵 그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으면서도 자정을 넘긴 술자리에 끝까지 앉아 있었고 말이 거의 없었다. 술자리란 흥분되고 무절제한 이야기의 성찬이기 마련인데 시인은 본능적으로 그런 말은 세상에 일절 내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듯했다. 하물며 정치에 관한 담론은 췌사에 끼지도 못하는 것이라 일언반구 꺼낸 적이 없었다. 어쩌다 나오는 이야기는 세속적 관심이나 이익과는 관련 없는 어떤 분야를 지독하게 파고들어가 발견한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어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몇 달, 몇 년 뒤에 불쑥 그의 이야기가 망각의 지평선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진짜 시인의 어법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 수삼년 만에 만난 그는 속에서 용암이라도 치밀어오르는 것처럼 격정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화제는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와 정치였다.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참 동안 열변을 토하던 그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성형, 요새도 시를 씁니까?”

나는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럴 수도 없다고 도리질을 했다. 그가 내게 그렇게 물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 서너 달 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잠시 겪어본 바로는 시인은 누에가 실을 만들 듯 언제나 속으로 시를 쓰고 있다. 시인의 존재 내면에 충만한 시가 적절한 출구를 통해 표출이 되고 세상 밖으로 나온 뒤에 거듭된 교정을 통해 작품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그 시인에게 표출에서 완성까지의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스마트폰의 뉴스를 확인해야 하는 중독 증상과 주체할 수 없는 울화 때문이었다.

“그런 문제라면 글 써서 먹고사는 게 생업인 저 같은 사람이 더 심각하죠.”

내 응답에 그는 시를 쓰는 것 또한 ‘문필 서비스산업-자영업’이며 작가들이 원고료나 인세를 ‘받아먹고’ 사는 것처럼 시 쓰는 사람 역시 시를 씀으로 해서 살아갈 수 있으니 ‘생업’이라는 측면에서 시가 더 본질적이라고 했다. 어쨌든 작금의 ‘국정농단’ 사건이 우리의 생업을 농단하기에 이르렀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뒤로 청와대의 모습이 반쯤 드러나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시인은 인간의 내면이 가지고 있는 신비를 믿는 데서 시를 쓸 에너지를 얻는데 이번에 그나마 많이 남지 않은 시적 자산을 박탈당한 기분이라고 했다. 그 대신 막연하게 인지하고 있던 추악하고 더러운 권력 의지와 유치함을 넘어 유아적인 단순성, ‘무지몽매’와 ‘몰염치’의 유전자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처리도 되지 않는 유독한 쓰레기를 떠안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헌법 질서를 무너뜨리고 불법, 초법, 탈법의 범죄를 저지른 권력자, 그들에게 기생하며 자손대대로 먹고살 수 있는 사익을 챙기는 무리, ‘소년등과’ 해 비단길을 걸으며 권력자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여 출세하고 영화를 누린 현대판 신귀족 등등이 가진 생활의 세부, 예컨대 그들이 선호하는 주사와 성형외과와 구두와 가방, 혼맥과 인맥과 금맥과 증거인멸의 수법, 비슷한 족속을 갈취하는 방식 같은 디테일을 알게 된 게 소득이라고 응대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극히 소비적인 것이라 세간의 화제로 오르고 나면 소설로는 가져다 쓸 수 없는 방사성폐기물 같은 게 돼버린다고 설명했다.

시인이 시를 못 쓰게 하는 ‘생업 농단’은 시인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한 가지 담론의 독재 체제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서비스-자영업 종사자들이다. 분노와 스트레스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생산성이 떨어진다. 동네 식당이 장사가 안되고 가게 매출이 바닥 모르게 떨어지고 전시회, 연극 공연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없어지고 책 읽는 사람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생업 농단의 피해는 이미 노후 걱정 없이 부를 쌓아놓고 있는 사람이나 공무원처럼 탄탄한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부자에게는 일시적으로 지나갈 바람이 매일이 생계의 전장인 민초에게는 뿌리가 송두리째 뽑힐 수 있는 태풍이 된다.

특검은 수사 중이고 헌재는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국가를 뿌리부터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을 철두철미 규명하고 공정하게 해명할 기회를 주어야 하며 절차를 제대로 밟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논리적으로야 맞다고 해도 나라와 시민의 삶이 망가뜨려진 다음에 사법적 정의를 구현하면 뭘 하겠는가. 작은 가게 하나 혼자 꾸려가는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가는데 보증금을 월세로 다 까먹고 길바닥에 나앉아야 결과가 나올 것인가. 그 결과라는 게 제 아무리 속시원하다 할지라도 이미 다 타버린 속으로 느낄 수나 있을까.

수사와 재판, 단죄와 청소를 속결하라. 지엽에 구애받지 말고 대의에 따라 결단하라.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람들에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환멸, 절망을 안겨주지 말고 참회하고 사죄하라.

미적거리다가는 다 죽는다. 풀뿌리만 죽는 게 아니다. 나라와 공동체의 삶, 현실을 지탱하는 시스템, 미래가 모두 죽는다. 일초 일분이라도 단축하는 게 조금이라도 더 생기를 보존하는 길이다. 정의는 때로 절차의 명쾌함, 신속성에 의해 실현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인내하고 인고하던 민심이 어느 순간 임계점, 비등점을 지나면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뒤집고 불태우고 재로 만들어 성층권으로 날려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권력이고 부귀영화고 월세 따박따박 나오는 건물, ‘사’자 돌림의 직업, 고액연금이 보장된 직업이고 뭐고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기미를 지극히 예민하게 감지하고 파국이 머지않았음을 예견하는 존재가 시인이다. 그런 시인을 만났다.

<소설가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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