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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률이) 특히 죽은 사람의 가족들 입장에서는 적절하게 이름 붙여지는(labelled) 것이 중요하다.” 영국에서 ‘기업살인법’ 논의 과정에서 법 이름이 너무 과격하지 않으냐는 제기에 대해 영국 행정자치부 차관이 일갈한 얘기이다. 그저 ‘사고’가 아니라 ‘범죄’이자 ‘살인’이라고 정확히 이름을 불러야만 대형 사고들을 예방할 수 있다는 거다. 2007년에 이 법이 제정된 후, 거짓말처럼 영국의 산재 사망률이 줄어들고 있다.

이 법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까닭은, 개인이 아니라 기업에도 형사책임을 지운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이사진만 수십명에 달해 사고가 발생하면 도대체 누구에게 안전 책임을 지울 것인지가 분명치 않아 처벌을 피해가는 일이 많았다. 잘못과 책임은 분명한데, 누구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는 기막힌 현실을 가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업을 징역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형사처벌이라 해봐야 벌금형이 전부이지만, 벌금 상한선이 없어서 이론적으로는 사고를 낸 기업이 망할 정도의 벌금형도 가능하다. 사람이 아니라 기업에도 ‘살인죄’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이 법이 논의되기 시작한 배경은, 놀랍게도 한국의 세월호 참사와 쌍둥이처럼 닮은 사건이었다.

2000년 10월 영국 하트필드 지역에서 4명이 숨지고 70여명이 다친 열차 전복사고가 일어났다. 법원이 선로 균열을 방치한 회사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영국에서 ‘기업살인법’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출처 : 경향DB)


1987년, 앞의 문이 열린 채 항해 중이던 영국 여객선이 벨기에 근처에서 침몰해 승객 150명과 선원 38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법원은 기업의 과실치사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상에서 발생한 사고라는 이유로 산업안전법도 적용이 안되었다. 영국 사회 전체가 비참한 탄식으로 가득 찼고, 자기반성과 광범한 토론이 시작되어 기업살인법 제정의 촉매제가 된다.

하지만 똑같은 사고에 대한 한국 정치권의 반응은 어떠한가. 여야가 논의 중인 ‘세월호특별법’에 유가족 의견을 반영할 것을 촉구하며 국회에서 농성을 벌여도 꿈쩍하지 않는다. 영국은 법의 이름도 희생자 유족 입장에서 지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한국은 법안 내용에 유가족 의견을 반영하는 것조차 가로막힌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민심은 둘일 수 없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그렇다면 진상규명 의지는 ‘세월호특별법’에 담고, 재발방지를 위해 ‘기업살인법’을 제정하는 게 순리이다. 하지만 여야가 제시한 특별법은 의심스러운 진상규명 의지에, 재발방지책은 보이지 않고 오직 보상에 초점을 맞춘다. 유족들은 보상이 아니라 철저한 진상조사를 원하는데 말이다.

7·30 재·보선을 코앞에 두고도 이러니 두 개의 ‘새’당에 기대를 거는 게 애초부터 틀려먹은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업살인법과 세월호특별법을 동시에 들고 나온 후보가 한 명 있다. 평택을 보궐선거에 출마한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노동자 후보’임을 강조한다. 그러고 보니 세월호 참사에서 끝까지 아이들 곁을 지켰던 것은 안산 단원고 교사 노동자들과 승무직 선원 노동자들이었다. 그 노동자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버티고 있는 이 나라, 그렇다면 노동자가 직접 정치를 하고 사회를 운영해야 안전해지지 않겠는가.

지난 12일 새벽, 충북 영동의 각계터널에서 보수공사를 하던 코레일 하청업체 소속 2명의 노동자가 화물열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3년 전 인천공항철도에 5명, 지난 3월 청라역사 신축 공사장에서 또 1명…. 아, 이 나라는 어디까지 망가질 건가.

지난 5년간 25명의 동료와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는 맏상제이기도 한 김득중 지부장. 그가 외치는 기업살인법과 세월호특별법은 공약이라기보다 시대의 민심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 전체가 자기반성과 토론으로 바통을 이어받을 때 아닐까.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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