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많은 사람들이 기차, 기차역, 기찻길에 이어진 추억을 갖고 있을 게다. 훌쩍 가볼 수도 있지만 이미 떠나온 곳에 다시 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아련한 모습 그대로 마음에만 담아두기도 하는.


어릴 때를 떠올리면, 누군가 정성으로 돌본 게 분명한 작은 꽃들이 예쁘게 폈던 화전역, 새벽 어둠 저편에서 달려오는 기차 불빛을 확인하며 겨울바람을 안고 내달렸던 등굣길 운정역, 하굣길 기차를 기다렸던 수색역, 눈이 잘 안 보이는 데다 곧 부서질 듯 마른 할머니와 탔던 기차가 떠오른다. 꺼내보면 더 많은 역과 시간, 일과 사람이 딸려 나올 게다.


승객이 아닌 기차, 기차역, 기찻길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어떤 추억이 있을까. 사람과 사연이 무수하리라. 보람과 더불어 힘겨운 현실도 만만찮았을 게다. 2만5000V 고압 전류가 머리 위로 흐르는 철길에서 눈비를 피하지 않는 일인 데다, 뙤약볕에 ‘엿가락처럼 휘는 선로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철로가 얼어 끊어지면 달려가 바로 연결해야 한다. 그래야 화물이든 사람이든 막힘없이 이동할 수 있다.


철도 노동자들이 직접 쓴 <철길에 핀 민들레>와 <47, 그들이 온다>는 책에는 그이들의 추억이 담겼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한 해 순직자가 서른 명은 생겼다던 현장. 한정된 시간에 일을 마쳐야 하는 촉박함은 ‘열차가 무거운 쇳덩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우리의 몸이 열차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가 터지고 뭉개지는 부드러운 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무감각해지고 일에 매몰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안전하게 정시 도착을 목표로 운전하는 동안 긴장을 늦추지 못하며, 예상할 수 없는 사상 사고를 겪어도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혼자 고통을 감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관사도 여럿. 동료의 죽음을 가까이서 보거나 멀리서 들어야 했던 철도 노동자의 상처가 철길과 굄목, 자갈 밑에 고스란히 누워 있을지도….


두 책에는 철도와 관련해 이런 역사도 담겼다. 민주적인 노조가 들어서기 전까지 철도 현장에는 불합리와 부당함이 많았다. 노조가 노동자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게 아니라 당시 사용주인 철도청과 한통속이었다. 흔히 말하는 어용으로 노동자 위에 군림했다. 그런 이들이 ‘노동귀족’이다. ‘관리자와 노동조합이 합작하여 인사를 전횡’하고, ‘잘못된 것을 말하기조차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이는 징계를 받고, 유배 받듯 멀리 전출됐다. 그러니 각종 부당노동행위에도 그저 참고 침묵, 말 잘 듣는 일꾼으로만 살아야 했다.


일터로 돌아가는 철도노조 조합원들(출처 :경향DB)


굴종의 역사에 서서히 금이 가 2001년에 비로소 깨졌다. 그해, 전국철도노동조합은 민주적인 노조로 거듭났다. 노동 현장의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긴밀하다. 노조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그리고 그 뒤 여러 일이 있었다. 1988년과 1994년 기관사 파업, 지부나 분회의 변화, 간선제였던 선거제도를 직선제로 바꾸기 위한 노력, 근로조건 개선, 각 정부에서 추진한 철도 민영화 정책을 막기 위한 고투였다.


노동자와 노조가 최후로 찾았을 방법인 파업에 언론과 정부는 그때마다 ‘불법파업’이라 했다. 노동자를 해고하고, 징계하고, 구속했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서지 않았다면 기관사라면 당연히 꿈꾸는 무사고 100만㎞ 운전을 충분히 달성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 자리에 섰던 ‘이유’는 지금처럼 늘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2013년 겨울, 철도공사와 정부는 수서발 KTX 분리는 경영에 관한 일이라며 철도노조의 대화 요구를 거부했다. ‘철도 민영화 반대, 공공성 강화’를 지지하는 시민의 뜻에도 귀를 닫았다. 대신 파업 초기부터 징계성 직위해제, 노조간부 수배, 민주노총 공권력 투입, 최후통첩, 파업 참가자에 대한 직권면직 입법 운운을 이어갔다. 


그 암흑 같던 불통의 스물두 날의 끝머리에 희소식이 들린다. 국회에서 철도발전소위를 구성하고, 그 즉시 노조가 파업을 철회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는 보도다. 하지만 파업은 끝났어도 수서발 KTX의 민영화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이제 곧 새해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수서발 KTX의 문제가 산뜻하게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보다 철도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 ‘철밥통’이라는 말로 훼손할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온 철도 노동자가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고, 수서발 KTX 문제로 어느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서울광장에 섰던 일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박수정 르포작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