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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정치관여죄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산되자 국정원은 느닷없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중 북방한계선(NLL) 관련 내용의 일부를 자의적으로 발췌, 요약해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에게 공개했다.
국정원의 불법 선거 개입과 6년 전의 정상회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국정원장은 친절하게도 ‘국정원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서거한 전직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한 발언과 국정원의 ‘명예’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인터넷 사이트에서 ‘댓글놀이’로 여론 조작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국정원 요원이 적발된 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관련 사실을 부인하다가 더 버틸 수 없자 ‘국정원의 통상적인 대북심리전 활동’이었다고 주장했다. 현 남재준 원장의 ‘명예회복’ 발언은 이 주장과 똑같은 사고체계 위에 있다. 국정원 요원들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정체를 감추고 야당 후보를 비방한 행위가 ‘명예로운’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야당 후보가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북한의 간첩이거나 이적세력의 대표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국정원장은 정상회담 회의록 발췌 요약본을 공개하면 이 전제의 정당성이 저절로 입증될 것이라 본 듯하다. 그는 국정원이 비록 김정일 사망 소식조차 외신을 보고 알 정도로 대북 정보 수집에는 무능했지만, 국내의 이적세력에 대해서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치사해 보이기는 하나 본질상 명예로운 업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한 셈이다. 국정원장이 보통 사람과 다른 독특한 사고체계의 소유자라면, 이렇게 해서 국정원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희한한 ‘명예회복’을 위해 국정원은 대략 네 가지 중죄를 저질렀다.
첫째, 법치주의를 짓밟았다. 국가기관이 법을 위반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명예를 가장 심각하게 손상하는 일이다. 어떤 국가기관이나 개인도 법 위에 설 수는 없다는 것이 법치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둘째, 대한민국의 위상과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했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은 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믿지 못할 나라, 정상 간에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무슨 일이든 일단 선례가 생기면 관행이 되기 마련이다. 앞으로 어느 정파가 집권하든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막을 수 없게 됐다.
셋째,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를 했다. 정상 간의 약속은 국가 간의 약속이다. 설령 대화 내용 중 해석이 애매한 대목이 있더라도 ‘국익’에 맞게 해석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회의록 원문에 그런 내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를 약속한 게 분명하다고 해석했다.
정치외교적 사안에 대해서는 집권여당의 해석이 ‘유권해석’이다. 이로써 한국은 NLL 포기를 약속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 나라가 됐고, NLL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 명분을 얹어 주었다.
넷째, 사람들의 마음에 증오의 씨앗을 뿌려 놓음으로써 민주주의의 토양을 오염시켰다. 상대를 이적세력으로 지목하는 것은 박멸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수 언론사가 이런 태도에 동조함으로써, 사회 일각에서 야당과 그 지지자들을 ‘물리적으로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정치적 증오감이 증폭되고 있다. 역사상 전체주의와 무차별 대량학살을 낳은 것은 대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런 근거 없는 증오감이었다.
역사는 몰인정한 채권자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뿌려놓은 허위와 증오의 씨앗이 이대로 자라면, 미래세대가 끔찍한 희생을 치르며 거두어야 한다. 더 자라기 전에 지금 거둬들여야 한다. 역사에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것만큼 치욕적인 일도 없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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