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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웠다. 선물로 받은 판화 액자를 마땅한 자리가 없어 걸어둔 곳이 잠자리 머리맡이었다. 판화로 표현했지만 그림 너머 쇠로 만든 삽차가 내게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게다가 삽차 팔 끝에 올라앉아 팔을 뻗어 외치는 사람들이라니. 2010년 10월, 가산디지털단지 네거리 대형 상점가 뒤, 철거된 공장 앞에 멈춰 선 삽차 위에 오른 이들과 맞은편 경비실 옥상에서 단식농성을 하는 이들을 보고 돌아오던 길이면 밑도 끝도 없이 슬펐던 탓일까. 꿈자리가 사납거나 가끔 가위 눌리는 일을 핑계 대며 나는 슬그머니 액자를 떼어냈다.


이제 좀 머리맡이 가벼워질까 했다. 그런데 그림 속 주인공인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지금 철야농성 중이다. 2005년 노조를 만들어 회사에 정규직화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협상을 요구했다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시작한 투쟁이 2010년에야 마무리됐다. 공장 앞 농성장에 하루씩 바꿔 붙인 날짜가 1895일이 될 때였다. 그 노동자들이 종이에 투쟁 날짜를 적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설을 앞두고 가보니 사무실 문에 벌써 ‘30일’이라는 숫자가 붙었다.


복직 유예기간, 일을 주지 않아 출근해 회사에서 대기했던 시간까지, 꼬박 3년을 기다린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새해를 앞두고 회사가 야반도주하고 자기네 직원이 아니라는, 말이라 할 수 없는 말을 한다. 이들이 텅 빈 사무실에 농성장을 꾸린 건 선택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밀양 송전탑 농성장(출처 :경향DB)


투쟁하던 중에 태어난 아이가 어느덧 다섯 살이 되었다는 미영씨가 이제 3월이면 세상에 나올 배 안의 둘째아이와 함께 농성장을 지켰다. 자신은 아이 때문에 밤에는 집으로 가지만 여기서 잠들어야 하는 다른 동료들은 내내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해 저항하면 함께 목소리 보태는 게 중요한 것임을 아는 기륭 노동자들은 그날도 중앙대 청소노동자들에게, 한남운수에서 해고된 정비노동자에게 달려갔다.


2010년 11월1일 국회에서 열린 ‘금속노조-기륭전자 합의문 조인식’을 기억할 게다. 사진에 찍힌 노사 대표 모습이 내겐 아직도 또렷하다. 삽차에서 떨어져 으스러진 발뒤꿈치를 수술한 남편과 병원에서 신문을 봤다. 바랐으나 올 것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파견직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유예기간을 두긴 했으나 생산설비를 완비해 다시 일터에 선다니…. 그러기까지 삭발과 단식, 고공농성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한 노동자들이었다. 구사대·용역경비 폭력에 공권력 폭력까지 안 당해본 일이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제24회 인권상(2010년) 수상자로 금속노조 기륭분회를 선정하면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기륭 노동자들이 앞장서고, 여러 분야의 무수한 사람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연대해 함께 얻어낸 결과였다. 노사 합의에 더한 사회적 합의, 당사자보다 지켜본 증인이 더 많은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지금 무시를 당한다. 기륭만이 아니다. 한진중공업도 마찬가지다. 정리해고가 살인이 된 사회, 수많은 이들이 자기 사는 곳에서 스스로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1년 뒤 현장복직을 약속했던 2011년 11월9일 사회적 합의는, 복귀 3시간 만에 강제휴업 명령으로 무시되었다. 그동안 한진 노동자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알게 모르게 여전히 어디선가 누군가는 불법파견·간접고용과 정리해고 문제로 혼자 아플 것이다.


판화를 다시 머리맡에 걸어야 할까. 농성을 시작한 이들을 모른 체하면 안되겠다. 2월6일 국회에서 ‘사회적 합의 불이행에 대한 사회적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린다. 기륭과 한진 노동자들이 나선다. 다시 듣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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