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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청년들이 단기 성공 대신 장기 생존을 추구하고 있다. 사회적 삶이 서바이벌 게임처럼 변모한 지금, 오래 살아남은 자가 승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러시안룰렛이나 폭탄 떠넘기기와 같이 매번 탈락자를 솎아낸다. 이렇게 되면 게임에 임하는 근본 태도가 달라진다. 이번만 피하고 보자. 남에게 위험을 전가하자. 하지만 마냥 운이 따라줄 수만은 없다. 어차피 승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는 잔혹한 게임에서 패배는 시간문제다. 경쟁에서 이길 때 잠시 기쁨을 누리지만, 패배자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괴롭고 처연하다.

짧은 주기를 가지고 거의 무한 반복되는 서바이벌 게임은 비극을 연상시킨다. 비극이란 무엇인가? 비극에서 주인공은 악한 사회의 도덕법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파멸에 이른다. 관객은 이 싸움이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끝날 것임을 예감하기에 비장감을 느낀다. 주인공이 선한 덕성을 지닐수록 이는 더욱 증폭된다. 마침내 주인공을 좌절시키는 사회의 도덕법칙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비극은 악한 사회를 위협한다.

지금 사방에서 청년들이 악한 사회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울부짖고 있다. 하지만 기성세대 관객은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SBS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여기에서는 ‘소박한 일’을 무한 반복하면서 그 분야에 달인이 된 사람이 등장한다. 프로그램 소개다. “수십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며 부단한 열정과 노력으로 달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 사람들을 소개하는 삶의 스토리와 리얼리티가 담겨 있는 프로그램.” 2005년 4월에 처음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2018년 10월 말 현재까지 총 643회나 방영되었다. 워낙 장기 생존에 뛰어난 달인들만 찾아다니다보니 프로그램 자체도 장기 생존의 달인이 되었다.

달인사회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살아남은 자의 영예’로 뒤바뀐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말한다. 모든 패배는 너희들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사회가 악하다고 탓하지도 말고 패배를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작은 일이라도 성실하고 줄기차게 하다보면 언젠가 너희들도 우리 기성세대처럼 생존의 달인이 될 수 있다. 청년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주어진 일을 죽어라 열심히 하다가도 때론 갸우뚱 묻게 된다.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영예가 고작 생존이라면 이걸 굳이 ‘죽어라’ 할 필요가 있나? 이러한 회의는 청년들로 하여금 부당한 경쟁 게임 밖으로 나가도록 부추긴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대충 살자’ 놀이가 한 예다.

이를 보는 나의 심경은 복잡하다. 지방대생들이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로 살아가고 있다는 연구를 얼마 전 발표한 터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지방대생은 모든 상황에 적당하게 관여하는 것을 서로의 의무로 받아들인다. 이제 이러한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이 모든 청년들로 확산되고 있는 것인가? 본격적인 경험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나는 여기서 어떤 차이를 본다. 지방대생의 적당주의가 유사가족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적당주의는 모든 사회관계 밖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한 전자가 상황에 적당하게 관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예 상황 밖으로 나가 관여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달인이 되라고 강요하는 사이 청년들이 적당주의로 응수하고 있는 셈이다. 생활의 달인 흉내를 내다가는 일찍 ‘불타 없어져’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대충 살아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좋은 사회다. 죽어라 노력해야 생존할 수 있는 전장 같은 사회는 분명 악하다. 그래서 청년들의 적당주의는 달인사회에 대한 나름의 저항일 수 있다.

하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우선 장기 생존하기 위하여 대충 살아가는 삶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더 나아가 청년들이 상황에 아예 관여하지 않게 되면 우리 사회에 더 좋은 삶을 만들 희망이 고갈된다. 악한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일에는 몰입하고 헌신해야 한다. 무엇이 가치가 있는 일인지 청년들이 서로서로 계속 물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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