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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가 경선 승리 후 흘린 눈물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평소라면 누구나 후보가 되기까지 이런저런 사연이 많은 법이니 별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평소’가 없는 매일매일이 사건 사고인 사회가 아닌가. 그는 아들과 아내의 세월호 관련 발언으로 곤혹을 치렀다. 그 파장을 이겨내고 후보가 되었으니 감격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의 눈물이 “선거를 겨냥한 계산된 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대통령의 상태에 가깝고, 그는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인터넷 여론 중 하나가 흥미롭다. 가장의 출마를 원하지 않은 가족들이 일부러 막말을 했다는 분석이다. “집에서 왕따당하는 아버지의 눈물.” 정 의원의 눈물은 경선에서 승리해서가 아니라 가족들이 자기를 싫어하니 서러움과 외로움이 북받친 가장의 눈물이라는 것이다. 아들의 소신(“미개한 국민”)과 아내의 부적절한 발언이 선거에 유리할 리 없다. 도움 안되는 가족이 얼마나 서운했겠는가.

처음엔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서글픔이 몰려왔다. 가족 왕따설은 정몽준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권력층에 대한 대중의 가냘픈 기대가 아닐까. 믿고 싶지 않지만 일어난 현실은 세월호 사건만이 아니다. 희생자 가족의 고통을 “미개하다”고 개탄하는 이들이 통치 세력인 현실, 이 역시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교양이 있고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겠지, 이념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말을….” 기가 막히는 심정을 넘어, 두려움에서 나온 발상이다. 왕따설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자기 보호, 스스로를 위로하는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설마… 아니죠?” 그런 심정 말이다. ‘인간으로서 국민’을 존중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공식적인 권력을 갖게 된다면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사회는 약육강식의 분위기가 지배할 것이다.

정 후보 가족만이 아니라 유가족에 대한 비난언설은 사회적 규범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다. 무고한 타인의 죽음에 대한 상스러운 언사도 문제지만 공적(公的) 영역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미개하다”고 보는 행태는 ‘선진 문명국’에서도 드문 일이다.

캐럴 길리건, 낸시 폴브레 등 서구 철학자들은 보살핌, 돌봄과 같은 가치가 공적 영역의 규범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쟁도, 돈도, 보살핌도 모두 삶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기존 규범은 지나치게 편향적이다. 보살핌의 윤리(care ethics)가 더 우월하다든가 삶의 전부라는 논리가 아니다. 보살핌이나 슬픔은 개인적 차원에서 가정과 비공식 영역에서만 표출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문제다.

눈물 닦는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


지금 공적 영역에서 통용되는 주요 규범은 경쟁과 승부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성장, 부국, 생산력을 숭배하는 발전주의 지향 사회다. 이를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요구되는 정신 상태는 자신감, 활달함 같은 가벼운 흥분 상태 경조증(輕躁症)이다. 도전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자세를 찬양한다. 예전 상어형 리더십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타인(부하)의 고통에 무감한 것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리더는 생산력을 독려하기 힘들다. ‘불도저’는 여기서 나왔다. 사람의 상태가 어떻든 그냥 무시하고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문제는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명랑할 수는 없다. 이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은 세월호의 바다처럼 인재든 천재든 고해(苦海)다. 사람들은 타인 앞에서 우아하고 쿨하고 이성적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것이 강자, 승자 혹은 교양인의 모습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우울하고 초라한 모습은 극복되어야 할 상태로 간주된다.

고통을 이길 수 없는 이들의 눈물과 분노, 넋 나간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개하다는 발상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은 물론 당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기준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감수성은 창의력의 기본 요건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 마비, 심리학에서는 사이코로 정의한다.

상처를 느끼지 못한 사람 중에는 흉터를 보고 놀라는 이가 있고 놀리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심각한 문제다. ‘상처가 없다’와 ‘느끼지 못한다’는 다르다. 전자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회피하는 것이다. 미개(未開)는 마음도 머리도 닫혀있어서 인지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미개함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비웃는 상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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