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속담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를 많은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살려면 개고생쯤은 참아야 한다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 속담의 본디 뜻은 천하고 힘들게 벌더라도 쓸 때는 훌륭하고 값지게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들이 분풀이 욕설에 발길질 당하고도 다시 꼬리쳐 밥 얻어먹듯, 간·쓸개 다 빼놓고 오만 꼴 참아가며 모으고 아끼고 잘 굴려 수십억, 수백억원 자산가가 됩니다. 이 중 다수는 돈의 노예로 전락해 더욱 탐욕스레 돈만 긁어모으겠지만, 모을 만큼 모았으니 이제부터는 베풀고 살련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후자가 바로 정승같이 쓰는 분들이지요.

역사적으로도 이런 분들이 꽤 계십니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중후기 최고의 부자, 경주 최부잣집입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데 이 집안은 무려 12대나 갑니다. 그 비결은 베풂에 있었습니다. 가훈이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고위직은 탐하지 말라),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 등등입니다. 소작으로 들어온 돈의 3분의 1은 빈민구제에 쓰고, 어느 심한 흉년엔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채무자들의 담보문서를 불사르는 결행까지 보입니다. 이렇듯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까닭에 고작 진사 벼슬들만 했어도 최부잣집은 대대로 정승 같은 존경을 받았지요.

얼마 전 과일 팔아 모으고 임대업으로 굴려 만든 수백억원을 학교재단에 기부한 노부부가 화제였습니다. 안정적으로 오래 장사하라고 임대료도 가급적 안 올렸다지요. 돈 있다고 갑질하고 탈세로 상속하는 갑부, 부귀에 공명이라고 정승 노릇까지 해보려 뛰어드는 자, 있는 돈 폼 나게 써보자는 이들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베풀 줄 모르는 자는 가난뱅이만 못한 헌털뱅이입니다. 돈만 많으면 3대에 개털 되고 덕도 많으면 누대에 정승이라고, 속담은 오래도록 말합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