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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사태는 법치주의하에서 산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어둠 속에서 보지 못했지만 바로 우리 옆에 계속 있어 왔던 절벽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절벽 너머로 떨어져버렸다. 이들 중에는 대기업들을 제치고 해외시장에서 활약하다가 일거에 도산한 건실한 수백개의 수출기업들도 있었다(키코 판결). 심지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의중에 맞게 재판일정이 조작되어 80여년 전의 지옥 같은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 한 푼 못 받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었다. 

해법은 무엇일까? 이번 사법농단은 제왕적 대법원장이 고위법관들에 대한 장악력 확대를 위해 상고법원이라는 새 기구를 만들려고 저질렀다. 이미 2017년 초 폭로되었던 판사블랙리스트도 일선 판사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해법의 초점은 제왕적 대법원장의 해체에 놓여야 한다. 실제로 올해 3월 개헌 논의 때부터 이미 사법부의 독립이란 무엇보다도 개별법관의 독립 그리고 개별재판의 독립성 보호임에 입각하여 법관을 대법원장의 영향력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안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그 중심에는 사법파동이 있을 때마다 개혁에 앞장섰던 판사회의가 있었다. 이들 사이엔 대법원장을 견제하도록 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런데 재판거래 리스트가 세상에 나온 지 5개월 동안 해법이 복잡해져 버렸다. 재판거래 관련자들에 대한 영장을 기각한 ‘방탄법원’이 여러 차례 열리면서 공분을 자아냈고 법원 밖의 기류는 판사들 전체를 불신하는 쪽으로 돌아서버렸다. 이제 법관회의를 주도하며 개혁의 주체로 나섰던 진보적 판사들의 조언도 거부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급기야 사법농단 사건만을 위해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법안까지 발의되었다. 또 일선법관들이 사법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관회의를 강화하여 법원사회를 수평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원래의 개혁안도 배척되고, 법관들 전체를 법무부나 국회가 더욱 강하게 감시하도록 하는 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국민 대 판사들 프레임이 짜이고 있다. 

그러나 평판사들 없이 제왕적 대법원장을 해체하려는 것은 교수들 없이 대학의 민주화를 이루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권력의 공백을 메꿀 구체적인 권력구조가 있어야 ‘감시자에 대한 감시’의 퍼즐이 완성된다. 유럽식의 평판사들 중심의 사법평의회나 미국식의 유권자들의 신임투표처럼 법관의 독립을 구체적으로 보호해줄 복안이 없이 판사들을 감시의 대상으로만 보면 사법부의 독립을 상실할 수 있다.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된 다음날인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이송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금의 판사들은 사법농단 사건을 무작위 추첨 사건배당에 맡길 수 없을 정도로 반민주적이고 불신의 대상인가? 약 10년 전 신영철 대법관 파동 때 일선판사들이 싸워 지켰던, 사건을 정해놓고 재판관을 뽑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무너뜨릴 정도로 양승태 일당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중요한 일일까? 모두 “예”라고 성급하고 대답하고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첫째, ‘방탄법원’은 입법불비로부터 연유한 면도 있다. 핵심죄목인 직권남용죄는 그 대의명분과는 달리 실무에서는 보통 공무원이 자기 부하에게 ‘의사에 반하는’ 공무집행을 강요할 때로 한정되어 적용된다. 이번처럼 심의관들이 자기일처럼 열심히 하는 경우에 적용된 사례가 많지 않다. ‘죄목 자체가 특정되지 않았다’는 영장기각사유가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다. 필자는 이 때문에 미국처럼 ‘공무원지위남용 기본권침해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바도 있다(경향신문 10월6일자). 현재의 직권남용죄 해석을 그런 방향으로 확대하는 방법도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린다. 

둘째, 박주민 의원의 다른 법안, 즉 사법농단 피해자구제법이 훨씬 더 시급하다고 본다. 양승태 일당이 얼마나 중대한 ‘위헌’행위를 했는지 충분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직권남용죄로는 관련 재판부 판사들이 ‘의사에 반해서 다르게 판결했다’고 증언하기 전에는 무죄가 나올 가능성도 틀림없이 있다. 이렇게 재판개입의 증거는 없어도 의혹이 높은 사건들에 대해 재심의 기회를 주어 절벽 너머 치외법권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우리가 양승태에 분노하는 이유가 이런 것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쓰는 동안 임종헌 행정처 차장의 구속이 이루어졌다. 기존 법관들이 스스로 해법을 찾아갈 기회를 줘 볼 여지도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공권력의 남용과 공권력에 대한 불신 사이의 악순환은 우리나라의 고질병이며 발생하는 문제마다 상황논리에 기초한 정치적 해법을 찾을 동기를 부여한다. 더 좋은 해법은 기존 공권력을 모범적으로 운용하여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본다.

<박경신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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