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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무협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젊은 승려 둘이 다친 새를 품에 안고 벌레를 잡아 먹이려 합니다. 주지스님이 이를 보고 어찌 불가에서 살생을 하느냐 나무라죠. 그러자 새와 벌레를 안기고 젊은 승려 둘은 줄행랑을 놓습니다. 다친 새와 잡힌 벌레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던 주지스님은 결국 새에게 벌레를 먹입니다. “그래도 큰 걸 살리는 게 낫겠지.” 주지스님의 판단으로 벌레를 죽여 새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만일 새와 벌레 모두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누군가의 인생과 생사여탈을 그 크기와 효용성에 맞춰 결정한다면요.
오랜 편파판결에 분노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왔다네요. 편파판정보다 더하다는 거죠. 집단성폭행범들은 미래 창창한 소년들이라며 풀어주고, 성범죄 의대생도 여태 했을 공부가 아까워 봐주고, 이빨 부러지도록 여성을 폭행한 남자는 본인도 반성하고 있으니 심한 처벌은 남은 인생에 가혹하다며 집행유예. 피해여성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든 선택받은 종족들만 선처(選處)받는 듯한 이 착각은 뭘까요. 가해남성이 피해여성보다 전도유망하고 가치가 커 보일 거 같은 무의식이 판결에 작용한 건 아마 절대 아니겠죠?
‘검둥개 돼지 편’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부류끼리 끌리고 감싸주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토종돼지(흑돼지)는 털이 검고 크기는 개만 합니다. 그게 돼지란 걸 알지만 검둥개는 왠지 자기랑 비슷해 끌립니다. 남 같지 않아 몸 비비고 핥습니다. 그래서… 에이, 아니겠죠. 힘없는 이를 위한 것이 법의 관용과 사법 재량인걸요. 그런데 왜 자꾸 그 관용과 재량이 편애하는 것 같을까요. 설마 가해남성에 감정이입되어 ‘나는 관대하다’ 이런 건 아니겠죠?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는 법정이 ‘남자가 좀 그럴 수 있지’ 하는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법복 검게 입고 가운데 앉으신 판사님, 남자주인공 날아오르라고 여자 좀 죽이는 건 영화 속 얘기인 거죠?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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