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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당신이 전 남자친구를 폭행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크게 놀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명절이면 방송되는 ‘아육대(아이돌스타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던, 당신의 성(姓)과 우사인 볼트를 합친 별명 ‘○사인 볼트’로 불리던 ‘체육돌’이었으니까요. 이후 당신이 쌍방폭행을 주장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랬겠지, 혼자 때리기야 했겠어’하고 가볍게 넘겼습니다.
아이돌 출신 ○○○씨의 전 남자친구 최모씨가 지난달 17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두하고 있다.
사연이 숨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전 남자친구 최모씨가 성관계 동영상을 전송하자, 당신은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왜 사건이 터진 뒤 곧바로 털어놓지 않았을까. 왜 ‘전 남친을 폭행한 여성 연예인’이 되는 일을 자청했을까. <피해자 ○○○ 향한 2차 가해 “영상 보고 싶은 사람 손 들어라”>라는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당신과 관련된 기사가 올라오자 “싸우든 말든 관심없고, 영상 보고 싶은 사람 손(들어라)” “얼마나 나쁜지 (영상을) 보고 결정해줄게. 일단 보내봐” 등의 댓글이 달렸다고 합니다. 2차 가해와 조리돌림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엽기적 호명(呼名)’을 당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겠지요.
이 글에선 당신의 이름 석 자는커녕 이니셜조차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사건이 ‘최○○ 동영상 협박 의혹 사건’으로 명명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최씨의 변호인은 공식 입장문을 통해 “최씨는 사건 당일 입은 상해에 매우 흥분한 상태에서 영상을 전송한 것이다. 유포는 물론 유포 시도조차 된 적이 없다”고 협박 의혹을 부인했습니다. 명확한 사실관계는 경찰 수사를 통해 규명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와 심하게 다투고 난 뒤 이런 영상을 건네받는다면 불안에 떨지 않을 여성이 있을까요. 최씨 측은 또한 동영상 촬영을 당신이 제안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합의하에 영상을 찍는 일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합의하에 찍었다 해도 그 영상물을 수단으로 타인에게 압력을 가할 때 도덕적·법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불법 촬영·유포 범죄와 관련한 여성들의 집회 현장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여성들의 공포와 분노는 상상을 넘어섭니다. 반면 처벌은 초라합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성폭력범죄 처벌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1심 판결 현황’을 보면, 2012~2017년 해당 혐의로 재판받은 피고인 7446명 가운데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사람은 647명(8.7%)뿐입니다. 10명이 법정에 서도 감옥 가는 사람은 1명이 될까 말까 한다는 것이지요. 최근 법무부가 죄질이 불량한 불법촬영·유포 사범에게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는 등 엄정 대처한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판결을 내리는 법원이 달라져야 하고, 관련 법률을 개정해 처벌을 강화하려면 국회도 움직여야 합니다.
당신은 유명 연예인이기에 두려움이 더욱 컸을 거라 짐작합니다. 다시는 방송 활동을 할 수 없지 않을까 절망했을지 모릅니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당신을 지지하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리벤지포르노범들 강력 징역해주세요’라는 청원엔 21만8000여명(8일 오후 5시 현재)이 동참했습니다. 청와대는 20만명 이상이 추천한 청원에는 공식 답변을 해오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궁금합니다.
다만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리벤지’는 ‘복수·보복’이란 뜻입니다. 피해자가 뭔가 잘못해 앙갚음당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포르노 역시 ‘외설·음란물’을 의미하는데, 불법촬영물은 디지털 성범죄의 결과물일 뿐 유희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성폭행 미수 의혹을 받는 브렛 캐버노가 연방대법관에 올랐습니다. 미국 상원이 캐버노에 대한 임명동의 투표를 진행하는 동안, 수많은 여성과 남성 시위대가 “Shame(on you)! Shame(on you)! Shame(on you)!”(수치스러운 줄 알라!)이라고 외쳤습니다. 한국에서 수치스러워해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닙니다. 가해자이고, 당신이 무릎 꿇도록 몰고간 이 사회입니다. 당신은, 폭력을 행사한 부분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지면 됩니다.
동료 남성 시민들에게도 부탁합니다. “리벤지 포르노란 없습니다. 불법촬영물만 있습니다. 이런 영상을 보는 일은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폭력이자 범죄입니다. 공범이 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시간에도 ‘○○○ 동영상’을 찾는 남성이 있다면 미국 사례를 벤치마킹하겠습니다. “Shame!”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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