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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한 연예인에 대한 협박 사건 때문이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 사이의 기념물일 수도 있었던 동영상을 상대에 대한 협박이나 강요, 복수의 칼로 사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촬영이나 제작에 당사자가 동의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최근 불거진 사건처럼, 명시적 협박이나 폭언이 수반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리벤지(복수)’의 효과는 발생한다. 특히 상대방이 유명 연예인이라면 그 효과의 크기는 상상하기 어렵다.

전 남자친구와 폭행여부를 두고 공방을 벌이고 있는 아이돌 그룹 카라 출신의 구하라(27)가 9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석,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구 씨는 지난 13일 새벽 전 남자친구 A씨 폭행 논란에 대해 쌍방폭행을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리벤지 포르노의 역사는 길지만 논쟁의 중심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30여년 전 미국의 한 포르노 잡지가 일반인들의 음란 사진을 투고받아 실은 것이 원조라 한다. 이 ‘일반인 사진’의 상당수가 사진 속 여성의 동의 없이 보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리벤지 포르노가 공공연하게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트위터나 구글 등이 자체적으로 필터링을 시작한 것은 겨우 3년 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으로 유명 연예인의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어 사회적 파장이 일었던 때가 20년 전이었지만 당시에는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는 회자되지 않았다. 도리어 유출 범죄자인 영상 속 남성이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사회가 많이 바뀐 듯도 하다. 이번 사건의 경우, 연인 간의 폭력 문제로 보도될 때만 하더라도 여론의 비난은 남녀 두 명에게 비슷하게 나뉘거나 여성 연예인에게 더 쏠리는 듯했지만 리벤지 포르노의 존재가 드러나자마자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남자 쪽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댓글이 셀 수 없을 만큼 달렸고, 리벤지 포르노에 대한 처벌 규정이 미진한 현실을 개탄하는 의견도 성별과 상관없이 강하게 터져 나왔다.

그런데 진짜 많이 바뀐 걸까? 신문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모두들 협박의 주체인 남성에게 분노하는 듯 보이지만, 남성 유저가 대부분인 온라인 커뮤니티의 온도는 조금 다르다. 문제의 동영상을 보고 싶다는 글들이 빼곡하다. 우스개처럼 쓰인 글이 대부분이라지만, 이 글들조차 어떤 이들에게는 칼이 되어 꽂힌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런 동영상을 찍은 여자가 잘못했다거나, 남성을 할퀸 여성 연예인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몇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리벤지 포르노’는 현상을 잘 표현해 주는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관객을 상정하며 그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연출된 영상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는 작년 이맘때 ‘리벤지 포르노’ 용어를 퇴출시키겠다고 공언한 바 있고, 한 서양 학자는 ‘성 착취 이미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동영상 그 자체는 죄가 없다. ‘텍스트’를 무어라 칭하든, 이를 유출하고 유포하고 시청하는 ‘행위’에 흉악한 이름을 붙여야 한다.

성에 대한 교육이 어려서부터 필요하다는 점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단순한 피임법 이야기가 아니다. 생물학적 성(sexuality)에 대한 교육과 성(gender)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에 대한 교육은 분리될 수 없다. <쇼미더머니 777>에 출연 중인 15세 소년 래퍼 디아크가 여자친구와의 성관계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알려진 정보로만 추정하자면, 그 과정의 폭력성 정도는 걱정스러운 수준이었다. 여성을 행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는 부실한 교육의 결과이다. 가정과 학교만 책임을 질 일은 아니다. 이 사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마지막 하나. 이번 사건을 남녀 대결의 문제로 확대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있지만, ‘리벤지 포르노’는 필연적으로 남녀 문제일 수밖에 없다. 남녀의 은밀한 모습이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될 때 한국 사회에서 누가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몰카’를 걱정하거나 불쾌해하지만 여성들은 두려워한다. 이 분명한 차이를 외면하고 애써 ‘범죄’의 문제로만 치환하는 것도 현실 개선에 장애물이 된다. 만들고, 유통하고, 즐기는 이들의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은 설령 여성을 군대에 보내도 바뀌지 않는다. 억울해할 일이 아니라 바꿔나갈 일이다.

한 연예인의 사생활을 굳이 꺼내 글의 소재로 삼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스타의 상품화에 익숙한 것이 현실이라면, 이왕이면 이 사례가 교훈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sexuality)과 성(gender) 문화가 조금이라도 정상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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