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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출근하다 말고 남편이 지긋한 눈길로 그럽니다. “요즘 당신이 고생 많아.” 이 양반이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눈 흘기며 출근이나 하라고 등 떠밀어 내보냅니다. 여느 날처럼 정신없이 쓸고 닦고 치우고 빨아 널고 나니 날이 뉘엿해집니다. ‘오늘 저녁은 또 뭘 해서 차리나’ 가볍게 한숨 쉬고 ‘있는 반찬에 고등어나 해서 올려야겠다’ 장바구니 들고 마트로 갑니다. 고등어가 왜 이렇게 비싸! 손 머뭇거리다 문득 ‘당신이 고생 많아’가 생각납니다. 피식, 그러곤 다시 빙긋 웃습니다. ‘다른 데서 아끼지, 뭐.’ 아내는 장어를 사 들고 콧노래로 돌아옵니다.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 온다’는 속담은 상대에게 좋게 대하면 내게 더 좋게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비짓국거리 사러 왔다가 고운 말 들은 생각에 ‘이 두부 얼마예요?’ 하게 된다는 말이죠(비지는 두부 만들고 난 콩 찌꺼기로 두부에 비해 형편없이 쌌습니다. 없는 살림에 참 물리게도 먹었지요. 요즘엔 콩 간 걸 비지라며 두부값으로 팔기도 하더군요).

한국 사람은 부부 사이에 애정 표현이 참 박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좋게 해줄 수 있건만 이제 와 살갑게 말하는 게 영 어색해 오글오글 목구멍부터 간지럽습니다. 연애할 때 그렇게도 속닥이던 꿀 발린 말인데 말이죠. “요새 당신 왜 그래!” 싫은 소리 해서 뭐가 남을까요. 아내는 생각할수록 종일 기분 상하고 본인도 저녁 때 분위기 싸한 집 들어갈 생각을 하니 떨떠름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 열고 들어가니 직접 차려 먹든지 말든지 텔레비전 앞에서 냉랭하게 꼼짝을 않습니다. 사랑과 가정의 달, 5월입니다. 기분대로 뱉은 말은 비위 상해 비지 사려던 손조차 내려가게 하고, 달달한 말은 빈말도 예뻐서 안주로 두부김치 올라오게 합니다. 빈말, 공치사라도 예쁜 말은 마음 써야 나온다는 걸 마음으로 아니까요.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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