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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철 헌법재판소장님, 우리의 헌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최근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정치권에 난리가 났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인구가 3.5배까지 차이가 나는 현 선거법이 위헌이기 때문에 인구격차를 2 대 1 이내로 줄이라는 결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결정이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번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과거의 전국구제도를 위헌이라고 판결하여 현재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게 만든 것에 이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중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민주주의의 기본은 보통평등선거입니다. 사실 근대민주주의가 시작된 프랑스대혁명 이후에도 투표권은 남자 유산자들에게만 주어졌고 보통평등선거가 실현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자유주의자들이 “인구의 다수가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통선거권을 도입할 경우 이들이 다수결로 사유재산제를 폐지시켜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고 걱정해 보통선거권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다가 보통선거권이 불가피해지자 이번에는 자본가들은 1인당 네 표, 노동자들은 한 표를 줘야 한다는 차등선거제를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힘 없는 민초들의 오랜 투쟁 끝에 모든 국민이 한 표씩을 행사하는 보통평등선거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보통평등선거제에 따라 형식적 평등은 이루어졌지만 선거구 간 인구의 불평등으로 투표가치의 불평등, 즉 실질적인 불평등이 심각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결정은 그 의미가 큽니다.

그러나 아시는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번 결정도 주목하지 못한 투표가치의 불평등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특히 이 불평등은 위헌 결정을 받은 선거구별 불평등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보수지역정당’들과 ‘군소진보정당’ 간의 불평등입니다. 2008년 총선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 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인 통합민주당과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득표율에 비해 의석수가 각각 20%와 5%씩 과대 대표됐습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정당들은 8.5%를 득표하고도 의석수는 불과 1.7% 얻는 데 그쳤습니다.

따라서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에 투표한 표는 진보정당에 투표한 표에 비해 각각 6배와 5.2배나 크게 반영되었습니다. 투표가치의 불평등이 무려 6 대 1, 5.2 대 1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진보신당입니다. 심상정 의원, 노회찬, 조승수 전 의원 등이 민주노동당 다수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탈당해 만든 진보신당은 2.94%를 얻고도 한 석의 의석도 얻지 못해 3%에 가까운 표가 모두 쓰레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석을 한 석도 못 얻었으니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에 던진 표 대 진보신당에 던진 표의 가치의 불평등은 무한대인 셈입니다. 주목할 것은 만일 투표가치가 평등하도록 디자인된 독일식 선거제도였다면 진보신당은 전체 의석의 2.94%에 해당되는 9석을 얻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랬다면 진보신당이 제도정치권에 뿌리를 내리고 진보정당들 내에서 ‘종북주의’에 비판적인 ‘건전한 진보정당’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헌재, '선거구 획정' 선거법 헌법불합치 결정 (출처 : 경향DB)


2012년 총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누리당은 43%를 득표하고도 의석수는 52%를, 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은 36.5%를 득표하고도 43%의 의석을 차지해 둘 다 20%씩 과대대표됐습니다. 그러나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녹색당과 같은 진보정당들은 11.4%를 득표하고도 의석수는 3.7%밖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진보정당에 던진 표에 비해 새누리당과 민주당에 던진 표의 가치는 3.7배에 달합니다. 이 같은 격차는 2008년에 비해 줄어든 것이지만, 위헌 결정을 받은 선거구 간의 불평등보다도 더 불평등한 것입니다. 이제 헌법재판소가 이 같은 불평등에도 관심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지역구제도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투표가치의 평등이 유지되고 사표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한 독일식 선거제도가 가장 이상적입니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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