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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두렵다.” 지난번 이 면에 썼던 칼럼의 제목이다. 연말을 장식한 정윤회 파동, 땅콩 회항,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의 청탁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라는 네 가지 사건은 박근혜 정부의 불통정치로부터 재벌, 제1야당과 한국민주주의의 현주소를 각각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망적이지만 진짜 문제는 새해에도 희망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라는 주장이었다. 구체적으로, 정윤회 파동에 대한 대응을 볼 때 박 대통령의 불통정치가 바뀔 것 같지 않고 새정치연합은 더더욱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글이 나간 뒤 진행된 현실은 이 우려를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새정치연합과 한국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는 2월 전당대회가 DJ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간 대결로 치러지게 됐다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후 좌파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일찍이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 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한국정치가 위기인 것은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죽어가는 낡은 것에는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만이 아니라 진보정당들도 포함되어 있다. 한심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결정이 아니더라도 진보정당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통진당의 2년 전 내분사태를 계기로 사실상 한국진보정당운동의 하나의 순환이 끝났다. 즉 일제와 해방공간의 제1기, 4·19 이후 나타났던 제2기에 이어 1987년 민주화 이후 이어져온 진보정당운동 제3기가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정의당과 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감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점에서 주목할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세월호를 계기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정치의 맹아’이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국민모임’(‘국민모임’)이라는 모임이 그것이다. 노동현장으로부터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은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의 눈물조차도 닦아주지 못하는 정치권에 분노한 시민사회의 각계인사들이 새정치연합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의 건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새정치연합의 무능과 세월호 문제에 대한 새누리당과의 담합적 합의로 상징되는 개혁의지 부족은 이 움직임에 기폭제가 되었다.

12월 24일 국회 정론관에서 명진스님, 김세균 교수 등 진보진영 인사들이 참여한 '국민모임'이 새로운 정치세력 건설을 선언하고 있다. _ 연합뉴스


특히 대통령 후보였던 정동영 상임고문이 이 부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며 어제 새정치연합 탈당을 선언했다. 사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핵심이었던 정 고문은 2010년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두 정권의 관계자 중 유일하게 민생파탄을 가져온 두 정권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문을 발표했고 노동현장 등 가장 고통받는 민초 속으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해 왔다. 새정치연합의 또 다른 개혁적 거물정치인인 천정배 전 의원도 새로운 정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민모임은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국민운동이지 신당 창당조직은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세력의 태동을 돕기 위해 신당추진위를 발족시키기로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그러나 아직 추진위도 뜨지 않은 신당의 지지율이 18.7%를 기록해 새정치연합의 코밑까지 추격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민모임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지, 아니면 거대한 태풍이 되어서 한국정치를 바꾸어 놓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과거의 진보정당과 같은 좁은 정파적 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대신 정동영 고문으로 대표되는 새정치연합 내 진보파와 기존 정당에 참가하지 않았던 무당파적인 진보세력,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그리고 정의당과 노동당과 같은 기존 진보정당세력들이 하나로 합쳐져 ‘일종의 진보 빅텐트’를 이루어야 한다. 단 이는 정치공학적인 합종연횡이 아니라 이윤이 아닌 생명과 같은 새로운 가치에 기초한 진정성 있는 가치연합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성공시킬 수 있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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