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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선 안되는 모임/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들이었다/ 빨리 없어져야 할 슬픔의 집, ‘한울삶’/ 더 이상 회원이 늘면 안되는 단체였다// 푸르른 얼굴의 영정 하나씩을 들고/ 눈이 벌겋게 붓고 시시때때로 목이 메이고/ 가슴이 찢어지고 넋이 풀린 이들이/ 떨어진 낙옆들마냥 한 잎 두 잎 모였다// 모이지라도 않으면/ 살 수 없는 시간들/ 분통이라도 터트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세월”(졸시 ‘가는 길 험난하여도’ 중에서).

지난 8월12일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낭송했던 여는 시다. 1970년 청년 전태일이 분신한 후 수많은 이들이 독재와 착취, 분단구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어떤 이는 고문으로 죽어갔다. 거꾸로 매달고, 전기로 지지고, 물을 먹였다고 했다. 항쟁의 거리에서 죽어간 이들도 많다. 때론 곤봉에, 쇠파이프에, 최류탄에, 소화기에 맞아 죽어야 했다. 지금도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생사를 오가고 있기도 하다. 어떤 이는 스스로 자신을 던져야 했다. 투신이었고, 분신이었고, 할복이었고, 음독이었다. 스스로 목을 맸다 했고, 실족사, 과실 총기사고라고 했다.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어떤 이들은 아직껏 행방이 묘연하다. 1999년 제정된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과 ‘의문사진상규명법’이 제정되고 국가가 인정한 죽음만 136명이다.

유가족들이 한 분 두 분 모여 아직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6년 통한의 모임을 만들었다. 진실규명, 명예회복, 보상만을 바라는 길도 아니었다. 죽어 간 이들이 염원했던 통일 조국을 내놓으라는 길이었다. 국가보안법 철폐, 노동3권 보장, 언론출판결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험난한 길이었다. 유가족들의 생업은 이제 변혁운동의 최전선이었다. 연행, 수배, ‘빵깐’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쟁의 길이었다. 그렇게 독재와 싸워 온 30년, 망각과 싸워 온 30년, 의문과 싸워 온 30년,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더 이상 빼앗지 말라고, 더 이상 죽지 말자고 싸워 온 30년이었다.

그 세월 동안 세상을 떠난 어른들도 많고, 이젠 거동이 불편해 나오시지 못한 분들도 많다. 한 분 한 분의 이름이 얼마나 아프고, 귀하고, 소중한지 모른다. 다행히 르포작가 송기역과 정윤영씨가 몇 년 동안 어른들의 삶을 받아 적은 유가협 30년 기록집 <너의 사랑 너의 투쟁>이 묶여 나왔다. 한 번쯤은 이분들의 고귀했던 삶과 투쟁을 기억하면 좋겠다. 이분들의 희생을 딛고서야 한국사회는 이만큼이라도 나아질 수 있었다. 다음은 유가협 창립 때부터 후원회장을 맡고 있으신 청화 스님의 시 한 부분이다.

“오늘 산업화의 샘물을/ 한 바가지씩 마음껏 떠 마시고 있는 이들/ 그 샘을 누가 판 것인지/ 그 사람들의 얼굴이나 아는지 몰라.// 또 오늘 민주화의 나무 아래/ 잘 익은 과일을 뚝, 뚝 따먹고 있는 이들/ 그 나무를 누가 심은 것인지/ 그 사람들의 이름이나 기억하고 있는지 몰라.”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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