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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말끔히 씻고 푹 자고만 싶었다. 삼일째. 네댓 시간밖에 눈을 못 붙였다. 작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 직사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선생께서 운명하실 것 같다는 소식에 들어온 길이었다.

고인에 대한 정부 당국자의 말은 직사 물대포만큼이나 기가 막혔다. 경찰은 서울대병원으로 들어오는 모든 도로와 문을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막고 조문조차 불허했다. 검경이 담합해 강제부검을 위한 영장을 두 번씩이나 청구하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있다. 얼마 전 국회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어떤 진실규명도 없이 이렇게 야만의 시간 320일이 지나가고 있다.

한 선배 시인은 선생의 죽음이 ‘죽음이 아닌 죽임’이라고 했다. 그렇다. 선생은 죽은 적이 없다. 죽임을 당한 것일 뿐이다. 담당 의사는 어떤 까닭에서인지 고인의 사망진단서 ‘병사’란에 표시를 했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선생은 박근혜 정부의 국가폭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까닭은 참된 민주주의에 대한 끝없는 헌신과 열망, 독재와 독점으로 치닫는 반민주 반노동자·민중 반통일 정권에 대한 도전과 저항 때문이라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칠순 노구에도 불구하고 15만 민중총궐기 맨 앞에 서서 역사의 진보를 앞당기려 했다는 죄였다. 가만히 있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과 행동, 투쟁으로 나섰다는 죄였다.

그렇게 선생은 평생을 이 척박한 분단의 땅, 불평등의 대지에서 희망이라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 온몸으로 살아오셨다. 자신을 드러내는 삶도 아니었다. 그가 쓰러지고 나서야 우린 선생의 숨겨진 삶을 알게 되었다. 아, 이런 고귀한 삶도 있구나. 이렇게 욕심 없고 가식 없이 순박하고 정직한 삶도 있구나. 놀라고 부끄러웠다. 이런 선생이 ‘보성농민회’라고 적힌 조끼 하나를 자랑스럽게 걸치고 우리와 함께 서 계셔 주셨다는 게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런 선생을 위해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 번째는 죽인 자들이 어떤 사과나 책임도 없이 시신마저 탈취하려는 강제부검을 오늘, 막는 일이다. 지금보다 더 엄혹했던 80년대 선생이 그러했듯 우리가 다시 ‘박정희 유신잔당 장례식’을 치르러 거리로 나가는 일이다. 차벽과 최루액과 물대포가 없는 세상. 소수의 독점과 착취가 없는 세상. 분단의 철조망이 걷히는 세상을 향해 우리가 선생이 쓰러졌던 종로 2가 한복판에 다시 서는 일이다.

새벽 5시. 아직도 영장 발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모두가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소식을 듣고 새벽길을 달려 온 택시들이 한 대, 두 대 늘어나고 있다. 공공부문 총파업에 나서는 서울대병원 노조분들도 본관 바닥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5·18 전남도청의 풍경이, 6·10 명동성당의 한 밤이 이러했을까. 한 알, 시대의 참된 밀알이었던 백남기 선생의 삶과 투쟁을 이 역사는 잊지 못할 것이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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