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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한 해를 알고 싶은가. 구렁으로 달려가는 뱀과 같도다. 긴 비늘이 반 넘어 들어갔으니, 가버리는 그 뜻을 누가 막으랴.” 소동파가 세밑 저녁을 보내며 지은 시의 첫 구절이다. 손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미끄러져 지나가버리는 한 해를 실감나게 묘사했다. 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해 안타까운 작가는 제야의 북소리도 새벽닭의 울음도 달갑지 않고 그저 이 저녁이 끝나지 않기만 바라지만,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젊은이들은 밤새 웃고 떠들며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자랑하더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신종 감염병의 대유행으로 몇 년간 자제해 왔던 온갖 모임들이 송년회(送年會)라는 이름으로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어차피 잡아둘 수 없는 시간, 반가운 이들과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서 잘 보내주자는 뜻으로 가지는 즐거운 모임이다. 자칫 과도한 술자리로 이어지기 쉽지만, 요즘은 문화공연을 함께 즐기거나 요리 경연대회로 기획하기도 하는 등 송년회의 양태도 달라지고 있다. 늘어지기 마련인 저녁 자리보다 점심 혹은 브런치 송년회가 인기라는 소식도 들려온다.

송년회의 계절에, 일본에서 온 어휘이고 뜻도 별로 좋지 않다고 하여 사라지다시피 한 망년회(忘年會)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날을 빌려서 잊고 싶은 일들을 까맣게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툴툴 털고 심기일전하지 않고는 새로운 해를 온전히 맞이할 수 없을 만큼 힘겹기만 한 삶을 반영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써 잊어버린다 해도 잠시에 불과하고 깨어나면 현실은 그대로다. 바꾸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에, 그렇게 열리는 새로운 해 역시 다시 잊어야만 할 날의 연속일 뿐이다.

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 것을 잘 보내야 새로움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다. 감염병의 유행이 여전히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왁자지껄 유쾌한 송년 모임으로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하기를 소망한다. 그와 함께, 단호하게 보내버려야 할 묵은 것들, 잊지 않고 집요하게 바꿔가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차분히 성찰하는 시간도 가질 일이다. 그래야 구렁으로 사라져버리는 뱀의 꼬리를 아쉬워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송구와 영신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연재 | 송혁기의 책상물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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