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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다른 주제를 잡아 보려 했다. 수천 년 쌓인 고전에는 지혜로운 말, 마음 비추는 글이 무한정 있으니, 마감 시간이 닥치면 뭐라도 잡아서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뉴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며 며칠째 눈과 귀를 온통 메우고 있는 저 참혹한 시공간의 이야기들에 나까지 무언가 더 얹을 만한 이유도, 자신도 없었다. 이 짤막한 글만이라도 그 일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채우고 싶었다.

그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 칼럼을 백지로 남겨 둘 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결국 그렇게 회피하고 싶었던 그 슬픔으로 메울 수밖에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어린 자식 넷을 연달아 잃은 서른 살의 아버지 장유의 애도시를 가져다가, 도무지 쓸 수 없는 글을 힘겹게 채운다.

“하늘 아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스무날 만에 네 아이를 다 잃다니. 큰딸은 아홉 살, 막내는 이제 돌. 일곱 살 둘째 딸은 얼마나 똑똑했는지. 셋째 아들 아철이 녀석, 귀엽고 참 잘생겼지. 책장 어지럽혀 혼도 나고 대추 곶감 달라 떼도 썼지. 바로 앞에서 재롱 떨던 모습 여전히 눈에 선한데, 손에 쥔 구슬 네 개 모조리 빼앗아 가다니. 곱고 아리따운 여린 꽃술들, 몰아치는 비바람에 빈 가지만 남았구나. 상여에 실어 빈 산에 묻으니 줄지어 나란히 선 네 개의 무덤. 하늘 향해 통곡을 하니 떠가는 구름도 나를 보고 멈춰 서네.”

일상의 행복을 단번에 깨뜨리는 불가항력의 사건. 장유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이 참사를 두고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사건은 늘 우발적이지만,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예상하고 대비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관계 당국이 해야 할 당연한 조치다. 애도의 기간과 무관하게, 정치적 공방과도 별개로, 사실에 입각한 철저한 규명과 조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번 참사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음을 암시하는 예후들은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끔찍한 집단 경험 이후에도, ‘있을 수 있는 일’에 대비하는 우리의 시스템은 여전히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회한의 깨달음이, 꽃다운 젊은 넋들을 보내는 슬픔을 더욱 무겁게 한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연재 | 송혁기의 책상물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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