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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동남아 여행 중에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유적을 찾기 위해 씨엠립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색안경을 낀 어떤 청년이 음악에 맞추어 처음 보는 이상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강남 스타일’이라는 자막도 떴는데 말로만 듣던 ‘말춤’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캄보디아에 이어 미얀마를 찾았다. 수도였던 양곤에서 만난 한 젊은 여성이 우리말을 제법 잘 구사해서 어떻게 배웠는지를 물었다. 주로 한국 TV 연속극을 통해서 배웠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생소한 한국 드라마의 제목을 줄줄이 댔다.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시작된 이른바 ‘한류’는 이제 미국은 물론 유럽에까지 상륙해서 한국 문화산업의 성공적인 진출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방탄소년단(BTS)’이라는 K팝 그룹이 최근 자주 이야기되기에 나의 젊은 시절 세계를 휩쓸었던 장발의 비틀스를 떠올리며 작년에 베를린에서 있었다는 그들의 공연 동영상을 보았다. 각자 여러 가지 색깔로 머리칼을 물들인 한국 청년 일곱 명이 무대 위에서 율동에 따라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우리말 가사로 된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도 독일 젊은 여성팬들은 꽤 열성적으로 함께 환호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장면을 보면서 1960년대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까지 흘리며 열광했던 당시의 젊은 여성들 모습도 떠올렸다. 그러나 비틀스의 음악이 기반을 두었던 당시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구조는 오늘날 방탄소년단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생산된 LP판을 통해서 유통되거나 대형 공연장에서 음악의 내용이 전달된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문화와 기술을 구별하기 힘든 디지털 매체가 사회관계망을 통해서 확산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방탄소년단도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거대한 대중음악 세계에 변방의 대중음악이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시사해준다. 그러나 그런 음악세계에 낯선 나에게는 이 아이돌 그룹의 성공신화가 얼마나 지속될지가 먼저 궁금해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했던 미국은 이른바 대중문화의 분야에서도 압도적인 지위를 누렸다.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대중문화가 실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만든 문화라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기에 나치독일 때 미국으로 망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그 대신 ‘문화산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거대한 독점자본이 막대한 이윤을 계속 창출할 수 있는 문화상품을 적극 개발하고 문화에 있어서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를 구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 속에서 그러한 문화산업은 계몽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성장을 방해하는 반계몽적인 ‘대중사기’라고 비판했다. 

그러면 오늘날 글로벌 정보사회의 핵심 중 하나인 문화산업은 TV수상기를 ‘바보상자’라고 불렀던 시절의 문화산업에 비해 어떤 차이가 있는가. 미국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스콧 레시는 기본적으로 문화와 기술이 맺는 관계양식이 다른 데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문화가 산업의 종속변수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산업이 문화를 뒤쫓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품 생산에 있어서 디자인에 쏟는 엄청난 투자를 예로 들고 있다. 이러한 차이와 함께 과거의 문화산업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문화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용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를 따르면 글로벌 사회관계망으로 연결된 팬들의 열성적인 참여가 방탄소년단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이라는 점도 설명해준다.

그러나 글로벌 문화산업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신자유주의의 맥락 속에서 이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견해는 여전히 있다. 공적인 의무를 방기하고 이미 퇴각한 공공기관의 자리를 차지한 각종의 문화 스폰서링은 문화가 자본과 시장에 더욱 종속되게 만들고 있고, 이는 결국 인간의 자율성을 훼손하기 마련이라고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비판한다. 70년 전에 이미 제기되었던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을 다시 상기시키는 주장이다. 아도르노와 부르디외의 문화산업에 대한 이런 비판은 그들의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부터도 기인한다. 스스로 현대음악을 작곡했던 아도르노나 계급과 계층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는 심미적 판단력에 깊은 관심을 돌렸던 부르디외의 문화나 예술 이해가 엘리트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문화산업에 대한 이런저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떠나서 분명한 것은 문화는 이미 다양화하고 다원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문화가 서로 만나면서 갈등도 생기지만 동시에 상호이해의 폭도 넓어진다. 이런 조건에서 방탄소년단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 주위에 2015년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해서 현재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성진의 이름은 알지만 방탄소년단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글로벌 문화산업과 연관된 한국적인 코드는 다양하다.

그러나 빌보드 차트 1위나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1위가 대서특필되고 그래서 이런 쾌거가 단지 국위선양으로만 간주된다면 오늘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화현상을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에서는 그런 경사스러운 사건도 실은 미국이나 유럽 문화산업이 주변부의 문화를 그들의 주위에 묶어 놓는 전략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편에서는 이를 주변부의 문화가 중심부의 그것과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는 긍정적인 발전으로 해석한다. 어떤 경우든 문화적인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반성 없이는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산업이 규범화하고 전형화한 틀로부터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와는 달리 베를린에도 이제 한국식당이 제법 많이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은 천편일률적인 식단으로 손님을 맞는다. 한국적인 미각을 살리면서 다른 음식문화와도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식단의 개발이 아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상상력이 결핍된 것처럼 보이는 베를린의 한 식당의 이름처럼 ‘밥과 김치’가 우리 음식문화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같이 호흡하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세계를 찾는 ‘역동역이(亦同亦異)’의 긴장이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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