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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장래에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냐”는 질문을 초등학생 시절 친구 사이에서 종종 주고받았다. 휴전 직후라서 어쩌다 얻어걸린 미군의 ‘레이션 박스’에 들어 있던 껌과 초콜릿의 맛과 향기는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우리 사이에서는 미국이 장래에 살고 싶은 나라 중 단연 첫째로 꼽혔다. 세계지리에 대한 상식이 좀 늘면서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스위스에 대한 동경심도 생겨났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난 1980년대 중반, 나는 가족과 함께 휴가차 스위스를 찾았다. 마침 제자였던 독일인 여학생이 스위스인 남성과 결혼해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외국인에 대해서 아주 배타적인 분위기 때문에 먼저 사투리인 ‘스위스식’ 독일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고충에 대해서도 들었다. 스위스의 금융시장은 옛날부터 순전히 장물취득장이며 러시아 마피아의 돈과 제3세계의 피 묻은 돈이 들어 있다는 사회학자 장 지글러의 자기 나라 스위스를 향한 신랄한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 동경했던 그 스위스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피하고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을 추출해서 사회의 구조와 기능을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을 구성한다. 그러나 모델을 구성하는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객관적인 모델은 없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릴 때 선망했던 미국을 나는 1970년대 중엽에야 처음으로 찾았다. 역시 땅도 넓고 물자도 풍부하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비교적 자주 미국의 여러 곳을 방문하거나 체류했다. 그러면 미국은 무엇인가? 1830년대 혼란스러웠던 유럽을 떠나 미국을 돌아본 프랑스의 외교관 알렉시 드 토크빌이 남긴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유럽에서는 부를 추구하는 지나친 욕망을 사회적인 위험으로 여기는데 오히려 미국에서는 개인주의적 자유가 사회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분석은 후에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애초부터 다른 국가와 다르다는 ‘미국 예외주의’의 이론적인 근거도 제공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이 다른 사회나 국가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으로만 이해되면서 미국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전용물이 되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의 등장 이후에 미국 보수주의의 중요한 싱크탱크의 하나인 ‘후버연구소’가 펴낸 <새 시대의 미국 예외주의>도 미국 사회가 비록 완전치는 못해도 모든 분야에서 글로벌시대를 확실히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놈 촘스키는 헤게모니를 지향하는 제국은 모두 예외주의를 표방했기에 미국 예외주의도 결코 ‘예외’는 아니라고 지적, 이 개념이 전제하는 미국은 항상 옳다는 신화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일본은 비서양사회에서 최초로 산업사회 진입에 성공, 제국주의 길을 걸었다가 패망했다. 그러나 미국의 엄호하에 1950년대 중반부터 고도성장을 누리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일본인론’이나 ‘일본문화론’은 미국과 서유럽과 다른 일본 사회의 ‘독특성’에서 성공비결을 찾았다. 1967년 여름 서독 유학길에 나의 출생지인 도쿄에 들렀다. 가난과 독재에 찌들었던 서울의 분위기와 달리 모든 것이 정돈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친·인척이 많이 살고 있는 일본을 자주 찾았다.

1970년대 두 번에 걸친 유류파동을 비교적 빨리 극복한 일본은 1980년대에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일본모델’은 전통적인 하청기업,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등의 ‘주변부’와 현대적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남성 노동자 등의 ‘핵심부’를 우선 분리시키고, 이로 인해 생긴 긴장과 갈등을 기업가족주의, 가부장적인 권위주의나 국가주의 등을 매개로 봉합하는 모델이었다. 자주 노동쟁의를 벌이는 자국의 노동자를 향해 ‘일본 노동자에게서 배우라’고 훈계했지만, 정작 ‘일본모델’을 미국이나 유럽이 도입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거품경제의 위기에 이은 ‘잃어버린 20년’은 일본모델을 사회과학의 논의에서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일본모델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도 자주 언급되었으나 경제규모가 우선 일본보다 작고, 미국과 지구적 패권을 겨루는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 인해 이에 대한 관심도 역시 시들해졌다.

여기서 나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로서 헤겔철학의 전문가였고 ‘유럽경제공동체’의 고위관리였던 알렉상드르 코제브(1902~1968)가 ‘탈역사’의 땅으로 지목했던 두 나라, 미국과 일본의 현주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미국의 풍요한 소비생활이 주는 쾌적함, 전통가면극 ‘노(能)’와 ‘이케바나’가 보여주듯이 내용보다 규범화된 형식이 지배하는 일본 사회의 조화와 안정은 생존투쟁의 무대인 ‘역사’를 벗어나게 했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시 그의 주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미국은 신자유주의가 가속시킨 불평등, 일본은 ‘후쿠시마’가 불러온 악령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화가 칸딘스키의 조카였던 코제브가 야스퍼스의 문하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하이델베르크대학을 나도 그 후에 찾았고, 그때로부터 어언 반세기 넘게 독일생활을 하고 있다.

이른바 ‘독일모델’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할 즈음에 내가 찾았던 서독은 철저한 시장자유주의에 기반한 미국이나 재벌과 관료체제가 결합된 이익집단 중심으로 운용되었던 일본과 달랐다. 시장과 사회적 화해 가운데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는가에 따른 정책적 갈등은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장경제와 사회적 연대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사회적 시장경제’는 독일통일 이후에도 추구되었고 2009년 말에 발효된 ‘리스본협정’에서도 유럽연합이 지향하는 목표의 하나로서 명기되었다.

‘라인강 자본주의’라고도 불린 사회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바탕 위에서 이룩한 번영과 안정, 그리고 평화적 통일은 누구보다도 우리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미래의 한반도를 위한 한 ‘대안’으로서 독일을 현지에서 배우겠다는 국내의 학자와 정치인 수도 많이 늘었다. 주로 미국과 일본에 경도된 우리의 지식세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배움은 그저 남을 따라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건설하는 주체가 과연 누구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교육은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갈릴레이의 말처럼 사회모델의 구성도 결국 그러한 도움을 주는 수단이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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