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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많은 이들이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을 실시간 온라인으로 본다지만, 나는 아직도 오후 8시 혹은 9시 메인 타임에 TV와 마주하면서 하루 뉴스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행복하다. 하지만 이 여유 속에서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들의 젠더배열 내지 젠더역할을 바라보기가 많이 불편하다. 대개 메인 타임의 뉴스에는 남성과 여성 두 명의 앵커가 등장하여 남성은 좌, 여성은 우에 배치하는 게 하도 고정돼 있어서 공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글을 읽고 쓰는 문화대로 왼편에 남성을 앉히는 것이다.

이런 배치 공식을 깬 것만으로도 신선함을 제공하는 뉴스채널이 있긴 하지만 이것이 젠더배열의 전복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물론 정오 혹은 자정뉴스 등 여성앵커가 단독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남녀가 함께 나올 때는 남성 먼저 여성 나중의 배열로 앉힌다. 그 다음 공식은 남성이 연장자거나 경력이 많은 앵커라면, 여성은 보다 젊은 후배 앵커라는 오래된 제2 공식이 있다. 그러다보니, 그날의 헤드(첫머리)뉴스는 남성앵커 차지이고 여성앵커는 그것을 받아서 진행하는 것이 제3 공식이다. 어떤 날은 카메라가 한 번도 잡아 주지 않아서 여성앵커가 과연 옆에 앉아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긴 시간을 남성앵커 혼자 주요 뉴스를 진행한다. 그렇게 시청자들의 뉴스 관심을 상당히 소진시킬 즈음, 여성앵커가 참을성 있게 등장하여 중요성이 조금 떨어지거나, 생활과 관련되거나, ‘여성 문제’ 뉴스 등을 보도한다. 이것이 제4 공식이다. 토론이라도 있다면 거의 남성앵커들의 독무대가 되곤 한다. 여성앵커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가. 지난 6월 지방선거 때도 한 ‘진보적’ 뉴스 프로그램 선거 방송에서 남성들의 주도 속에서 여성앵커의 안타까운 모습이 재현된 적이 있었다. 질문이나 토론의 틈새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여성앵커는 이후 주말뉴스에서 사라졌다. 나를 포함한 여러 시청자들은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리라.

여성주의 인류학에서는 ‘여성의 교환’이라는 논설이 있다. 이 논설에 따르면,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만이 있고 여자는 교환의 대상이다. 결혼에서 여성은 고구마(신부비용)와 교환되고, 여성은 다른 친족체계로 이동한다. 가족뿐 아니라 법, 정치, 국가와 같은 공적제도 역시 운영하는 자는 남성들이고 여성들은 혜택을 받거나 혹은 받지 못하는 대상들이라는 것. 위에서 말한 ‘공식들’에서, 여성앵커들의 짧은 수명에서, 여성들의 경력, 경륜, 감각은 보잘것없는 것 같아서 나는 서글프게도 여성의 교환론을 떠올리게 된다.

방송법은 방송의 자유와 독립성뿐 아니라 공정성과 공공성, 차별금지의 의무까지 규정하고 있다. 이를 감시하고 실현하기 위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시청자권익보호위원회 등을 두었고 그 심의사항에는 인권존중, 양성평등 등이 포함돼 있어 그 역할이 기대된다.

합리성 없이 특정 집단 사람들을 우대, 배제, 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이라 한다면, 현재 TV뉴스에서 보여주는 여성역할 배치는 연령, 외모 등이 성별과 교차하여 빚어내는 ‘복합차별’이며, 그 관행이 매우 친근해서 차별로 보이지조차 않는 ‘구조적 차별’이라 할 것이다. 혹자는 이런 대우는 의도적이지 않은 것이고, 그 효과도 치명적이지 않은 ‘먼지’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차별효과가 있다면 관행이라도 차별은 정당화되지 않으며, 수많은 여성들이 평생 매일 먼지를 마시면 폐가 온전키 어렵다고 답하고 싶다.

한국에서 언론과 방송은 오락과 여가, 그리고 다양한 교육 기능을 담당한다. 특히 보도를 담당하는 뉴스방송 메시지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 깊은 곳까지 가 닿는다고 본다. 지금은 2018년, 이미 대학진학률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없어졌고, 각종 국가고시와 언론고시에서 여성들이 약진한 지 오래다. 그런데 그 많은 능력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8시 메인 뉴스에서 중년의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앵커들을 보고 싶다. 젠더평등을 가르치기 전에, 여성이 남성과 함께 있어도 여성이 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래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여여, 남남의 동성 앵커들이 함께 진행하는 방송도 보고 싶다(독일 Deutsche Welle에서처럼). 임신한 앵커와 안경 쓴 여성앵커, 그리고 외모와 무관한 여성앵커들이 자기 몸을 울리면서(肉聲) 말하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듣고 싶다. 이렇게 굳어진 공식을 깬다면, 어쩐지 방송에서 맑은 공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정신적 폐가 지쳐버린 수많은 시청자들이 그것을 호흡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양현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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