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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경하고 온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남대문에 대해 더 잘 안다.” 언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년 전까지 흔히 돌아다니던 속담이다. 얼핏 보는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확한 정보를 습득하는 데에는 더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속담은 들어서 얻은 정보가 진실인 줄 알고 우기는 사람을 조롱할 때 쓰던 것이다.

인류가 문자 생활을 시작한 지 수천 년이 흘렀지만, 문자 해독능력을 가진 사람이 다수가 된 지는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다수 사람에게 장거리 여행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장에 가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는 일도 17세기 이후에야 가능했다. 200년 전 사람이 평생에 걸쳐 만난 사람은 현대인이 하루에 만나는 사람보다도 적었다. 문자가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닫힌 세계’에서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은 듣는 것밖에 없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래서 옛날에는 거의 모든 정보가 들은 이야기, 즉 소문(所聞)으로 유통되었다.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과장과 왜곡을 피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 이치를 익히 알았기에, 새로 들은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얘기를 들려준 뒤 그 말을 믿으면 바보로 낙인찍어 놀리는 것은 인류의 보편문화였다.

국가권력이 법령이나 정령을 문서로 만들어 공포하는 일은 고대부터 있었으나,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모은 인쇄물이 유포된 것은 15세기 활판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였다. 뉴스라는 말이 생긴 것은 17세기 중엽인데, 새로 일어난 사건들이나 새로 밝혀진 사실들이라는 의미보다는 새로 떠도는 소문들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이 뉴스레터나 뉴스페이퍼를 ‘새로 떠도는 소문을 적은 종이’라는 뜻의 신문지(新聞紙)로 번역한 것은 적절했다. 신문은 솔직한 작명(作名)이었으나, 놀라운 마력을 발휘했다. 소문을 귀로 듣는 대신 눈으로 읽음으로써, 사람들은 사건을 직접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1883년 7월15일, 조선 정부는 통리아문 산하에 박문국을 설치하고 이노우에 가쿠고로 등 일본인 7명을 초빙해 근대적 신문 발간 준비에 착수했다. 같은 해 10월1일 관보와 논설, 국내외 새 소문을 모은 ‘한성순보’ 첫 호가 발행되었다.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되던 한성순보는 1884년 갑신정변으로 박문국 시설이 소실됨으로써 일단 종간되었다. 박문국이 재건되어서 신문을 속간한 것은 1886년, 발행 간격을 주 1회로 단축하고 제호도 ‘한성주보’로 변경했다. 그런데 1880년대 초 조선 정부가 의욕적으로 설립했던 신문물 도입 기관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박문국 역시 재원을 조달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한성주보는 운영비 일부를 보충할 목적으로 1886년 2월22일자 제4호의 두 개 면을 독일 상사 세창양행에 내주었다. 해당 지면에는 “덕상(德商) 세창양행 고백”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글이 실렸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광고였다. 당시에는 정부도 독자도, 심지어 광고를 낸 세창양행도, 자본이 세상에 떠도는 소문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돈을 받고 지면을 팔았음에도 한성주보는 곧 폐간되었다.

1896년 4월7일, ‘신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신문, ‘독립신문’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여기에는 사고(社告) 외에 여섯 건의 상업 광고가 실렸다. 그중 하나인 주지회사의 광고 문안은 “각색 외국 상등 물건을 파는데 값도 비싸지 아니하더라. 각색 담배와 다른 물건이 많이 있더라”였다. 자기 상점을 소개하면서 마치 남의 얘기를 전하듯 “~하더라”체를 썼다. 그런데 당시 기사는 모두 소문을 옮겨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하더라”체가 바로 기사체였다. 신문 광고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기사로 변장하는 술수를 부렸던 셈이다.

광고료가 신문의 주된 수입원이 됨에 따라, 광고는 신문 지면의 핵심 구성요소가 됐다. 신문사들은 광고를 지면 하단에 배치하여 기사와 구별했으나, 이 원칙은 자주 무시되었다. 광고는 계속 기사 흉내를 냈고, 기사보다 더 눈에 잘 띄기 위한 수법들을 개발했다. 그림과 사진을 활용한 것은 기사보다 광고가 먼저였다. 지면 상단의 ‘전면광고’라는 작은 글자를 보지 않고서는 기사와 구별할 수 없는 광고들이 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다. 광고가 기사를 흉내 냈을 뿐 아니라, 기사도 광고를 닮아갔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뉴스 기사가 ‘사실상의 광고’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의 가짜뉴스 단속 방침을 둘러싸고 논란이 거세다. 팟캐스트, 유튜브 등 새로운 매체를 이용한 가짜뉴스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공통의 골칫거리다. 역사상 국가권력이 가짜뉴스, 헛소문, 유언비어와 싸우지 않은 적은 없다. 하지만 이긴 적도 거의 없다. 당장 가짜뉴스의 정의(定義)가 문제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알리는 것뿐 아니라 사실과 사실 사이의 인과관계를 왜곡하는 것도 가짜뉴스다.

새벽 3시의 간장게장 골목 사진을 싣고는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자영업이 망해간다’고 쓴 기사나, 최저임금 인상 전에 촬영을 완료한 블록버스터 영화의 흥행 실패를 두고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영화산업이 망한다’고 쓴 기사도, 다 악의로 가득 찬 가짜뉴스다. 이런 가짜뉴스들이 나름대로 공신력을 확보한 매체들에 버젓이 실리는데, 무슨 수로 다 단속할 수 있겠는가? 신문과 방송이 대중을 계몽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시대가 끝난 지 이미 오래다. 대중 스스로 ‘각성한 상태’로 사는 수밖에 없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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