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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 해를 또 어김없이 보내게 된다. 지중해변은 춥지 않아 연말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가톨릭 신자가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포르투갈의 세밑 분위기는 그러나 이런 날씨와는 별 상관이 없다. 미국에서 비롯된 추수감사절의 다음날, 이른바 ‘검은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대대적인 할인상품의 공세로 많은 고객이 붐비는 상가의 모습은 독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때가 되면 모두 알게 모르게 시간이라는 괴물에 쫓기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시간은 그 자체의 힘으로 스스로를 보여줄 수 없고 단지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움직이는 어떤 다른 것에 의거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을 따라 울렸던 교회의 종소리는 신의 섭리를 담고 있는 영원한 시간을 상기시켰다.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고 이에 따라 우리 삶을 합리적으로 꾸릴 수 있다는 믿음은 르네상스 시기에 북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시계와 함께 뿌리를 내렸다. 장소나 날씨에 제약받지 않는 시계는 인간 스스로가 펼치는 복잡한 속세의 항시적인 동반자가 되었으며 일상생활의 총체적인 관리자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간접적으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의 이러한 속성은 동시에 시간을 개인의 삶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즉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을 가진 개인들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생활을 위해서 개인이 지녔거나 또는 지닐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하거나 포기해야만 한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 받았던 학교생활 시간표는 우리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시간에 관한 첫 경험일 것이다. 이같이 시간이 누리는 상대적인 독립성에 주목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시간도 자본이나 문화와 같은 개념처럼 변화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회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시간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사회성을 보여주는 비근한 예로 시간대를 들 수 있다. 2015년 8월15일, 해방 70주년을 맞아 북한은 전격적으로 서울시간보다 30분 빠른 평양시간의 도입을 선포했다. 당시 일부 서방 언론은 서울보다 30분 ‘늦은’ 평양시간에 관한 오보를 내보냈는데, 여기에는 남한보다 낙후한 북한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이 작용했을 것이다. 대한제국은 1908년 이미 도쿄보다 30분 빠른 시간대를 도입했지만 일제 식민지로 전락된 후인 1912년 조선반도는 도쿄시간대 안으로 편입되었다. 해방에 이어 온 냉전체제의 수립과 함께 서울은 도쿄와 같은 시간대에서 또 만나게 되었다. 작년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을 기해서 한반도는 같은 시간대 안에서 다시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시간이 지닌 사회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1956년 독립한 네팔도 인접 대국인 인도를 의식, 자국의 시간대를 인도보다 15분 앞당겼다. 베네수엘라는 2007년 12월 제국주의 심장 미국 위싱턴과 동일한 시간대 속에 함께 살 수 없다는 뜻에서 이전보다 30분을 뒤로 돌린 새로운 시간대를 도입했다. 에너지 전략의 차원에서 비록 이러한 조처를 2016년 5월 원점으로 돌리긴 했지만 시간이 담고 있는 정치적 정체성의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간대에 못지않게 시간의 사회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달력이다. 프랑스혁명 정부는 1793년 10월 지금 우리가 ‘양력’이라고 부르는 그레고리력 대신에 ‘공화력’을 도입했다.

혁명 이념의 하나인 평등의 정신을 따라 통상적인 십진법 체계로 하루가 10시간, 1시간이 100분, 1분이 100초로 된 시간 계산법이었으며, 12년 동안 실시되었다. 1년은 열두 달이었지만 한 달이 모두 30일로 되어 있고 5일 동안에 걸친 ‘민중주간’이라는 연휴를 포함한 달력이었다. 정치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 공화력은 후에 ‘파리코뮌’ 시기 잠시 빛을 보았지만 실행에 불편한 점도 많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담고 있는 이와 같은 비일상적인 혁명성에 주목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젊은 예술가 루스 이완은 2011년 도버해협 근처에 있는 소도시 포크스톤에서 3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전에 ‘우리는 우리가 원했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었다’라는 제하에 사라진 프랑스의 혁명공화력을 따라 제작된 대형 시계를 설치했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새로운 시간개념은 거부감이나 저항심도 불러오기 마련이다. 한때 ‘이중과세(過歲) 반대’라는 사회적 캠페인이 있었다. 1월1일이 새해의 시작이자 설날이니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까지 음력설을 쇠지 말자는, 일종의 관제운동이었다. 국민 대다수는 그러나 ‘신정’에는 설 기분이 나지 않는다면서 ‘구정’을 계속 고집했다. 또 갑오경장 이후 도입된 양력을 이유로 신정을 ‘왜놈설’이라고 비판하면서 구정을 쇠어야 하는 이유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정작 일본에도 있었다. 1930년대 국수주의의 기치를 내건 일련의 지식인들은 이미 쇠락의 길에 들어선 서구를 일본이 추종해서는 안되며 이를 오히려 넘어서야 한다는 취지로 ‘명치유신’ 이후 도입된 태양력을 서양력이라고 반대했다. ‘근대의 초극(超克)’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들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다.

시간이 보여주는 이 같은 사회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역시 개인의 삶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사회적 시간 안에서 살고 이에 의해서 통제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삶을 완전히 사회적 시간의 테두리 안에 가두려 하지는 않는다.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을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만든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나 ‘통속적인’ 시간성에 대해 ‘본래적인’ 시간성을 대비시킨 하이데거의 시간에 대한 실존철학적인 해명도 있다. 이는 사회적 시간만으로는 삶의 근원에 놓여 있는 시간의 비밀을 우리가 근본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는 논거들을 제시한다.

한 해를 마감하고 동시에 새해를 맞으며 모두들 시간에 쫓기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시간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을 때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무척 피곤해진 자신의 본래적인 시간을 찾기 위해 혼자서 아니면 가까운 몇 사람과 함께 조용히 산책길을 찾아 떠나는 ‘신년산책’이라는 풍습이 독일에는 있다. 사회적 시간이 어쩔 수 없이 몰고 오는 번잡과 소란, 또 이것이 남기고 간 허전함 속에서 자기의 본래적 시간을 찾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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