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비행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적어보자. 연상된 단어는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당신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해외여행, 휴가, 신난다” 등이 먼저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해외 출장이 잦은 사람이라면, “시차, 피곤하다, 울고 싶다” 등이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 저마다 다른 뇌 속 사전

이처럼 단어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데 실험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보트, 호수, 물, 시내”처럼 서로 관련된 단어들의 목록을 피험자에게 보여주고 기억하게 하는 실험을 생각해보자. 잠시 후 목록에 있던 단어와 없던 단어를 섞어서 보여주면서, 목록에 있던 단어만 고르게 한다. 그러면 목록에는 없었지만, 목록에 있었다고 잘못 기억하는 단어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물, 강, 컴퓨터”를 보여주면 목록에 있었던 “물”뿐만 아니라 “강”도 목록에 있었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사람들에게 “강”은, “강”이 목록에 없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보다 “보트, 호수, 물, 시내”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런 차이는 뇌 활동에도 나타난다. 측두엽의 앞쪽 끝부분은 단어의 의미를 처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작년에 출간된 한 연구에서는 피험자들이 단어를 하나씩 보는 동안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을 활용해서 측두엽의 앞쪽 끝부분의 활동을 관측했다. 그리고 목록에 있는 단어를 볼 때의 뇌 활동과 목록에 없는 단어를 볼 때의 뇌 활동이 얼마나 비슷한지 비교했다. 연구자들은 두 경우의 뇌 활동이 비슷할수록 목록에 없던 단어를 목록에 있었다고 착각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자들은 이 방법을 사용해서 사람마다 뇌 속에서 단어들이 다르게 표현됨을 알 수 있었다.

■ 경계의 언어

필자는 심리학, 생물학, 인지과학, 인공지능 등 여러 분야들이 얽혀있는 학문인 뇌과학에 종사하면서, 뇌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과도 자주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 따라 단어의 뜻이 다른 상황을 자주 경험한다.

“기억”을 예로 들어보자. 일상적인 상황에서 “기억”이라고 하면, 어제 있었던 일, 학창시절에 있었던 일처럼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을 의미한다. 하지만 심리학이나 뇌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요한 내용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작업 기억, “우리나라의 수도는 서울”처럼 말로 진술할 수 있는 지식에 대한 기억, 자전거 타기처럼 행동에 대한 절차 기억 등 여러 종류의 기억이 모두 “기억”의 의미에 포함된다.

한편, 신경세포 수준의 뇌 활동을 연구하는 뇌과학 전공자라면 “기억”의 의미는 훨씬 더 포괄적이다. 신경세포에 전해진 입력이 신경세포의 구조, 유전자 발현 등에 영향을 미쳐서 나타난 신경세포의 현재 상태에 가깝다. 신경세포의 상태는 신경세포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컴퓨터에서는 기억장치와 처리장치가 구분되어 있는 반면, 뇌에서는 기억장치와 처리장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단어의 용법이 다른 경우도 있다.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된 신경망에서는, 신경망의 한 부분을 활성화시키면 이 부분과 강하게 연결된 부분들이 연쇄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다. 패턴 속의 일부 정보(예: 비행기)만으로도 패턴 속의 나머지 정보들(예: 해외여행, 휴가)이 연달아 활성화된다는 의미에서 이 과정을 패턴 완성이라고 부른다. 패턴 완성은 기억 회상의 원리이기에 기억의 회상과 동시에 일어난다. 하지만 행위의 주체를 염두에 두는 사고에 익숙한 우리는 “기억을 회상함으로써 (주체의 의도 때문에) 패턴 완성이 일어난다”고 잘못 말하기도 한다. 이런 표현은 주체를 염두에 두는 사고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전까지는 바뀌기 어렵다.

말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한 분야에서 중요한 단어가 다른 분야에서는 논의되기 힘들 때도 있다. 예컨대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기 전부터 서구 철학에서는 의식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내면적이고 주관적이다. 어떤 사람이 사고로 뇌가 손상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어있음을 알릴 방법이 전혀 없다고 해도, 그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있으면 의식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객관적인 관측과 실험을 중시하는 과학에서는 이토록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특성이 강한 의식을 다루기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의식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토론을 하기 전에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하지만 의식의 사례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르면 단어를 정의하는 것부터가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세상을 보는 특정한 방식을 규정하는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분야 간의 교류가 늘어나는 요즘에는, 정의에 연연하다가 의미 있는 논의를 못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정의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되, 소통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으로 용어를 정하기도 한다. 의식을 연구하는 토노니, 공감의 부정적인 효과를 다룬 폴 블룸, 김재인 교수의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에서 이런 사례를 보았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엄밀한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문가들이 이럴 정도라면 일상적인 소통에서는 말해 뭘 할까. 정확한 소통을 위해서 가능하면 일반적인 용례를 따르는 것이 좋겠지만, 각자의 경험에 따라 ‘일반적인 용례’라는 것도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말이 통해서 뜻이 통하지 않는 줄 모르지 않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가리지 않도록,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뜻이 통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더 돌이켜본다.

<송민령 |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