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직설

수치심의 학교

opinionX 2016. 12. 21. 11:21

우아함이라곤 없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말이다. 특히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앉혔던 1차 청문회는 가관이었다. 신념이나 명예를 지키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들. 증인으로 출석한 자들은 ‘불법’보다는 기꺼이 ‘무능’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비록 사회적 선(善)이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믿음이나 철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에게는 고상함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정기준(윤제문 분)’을 떠올려보라. 그에게는 ‘악당의 기품’이 있었다. 하지만 증인석에 앉은 자들 중에 그 정도의 품위를 지키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나는 모르오, 나는 무능하오, 나는 꼭두각시였소”를 읊조렸을 뿐이다.

나는 이 처절한 무능의 스펙터클 앞에서 기괴함을 느꼈다. 자유주의와 만난 자본주의의 최고 가치는 기회의 균등과 능력 본위를 기반으로 한 합리성이다. 이 시대에 무능은 도태의 원인으로 여겨졌고, 무엇보다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발버둥 친다. 그런데 저들은 자신의 무능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그 큰 눈’을 껌뻑거릴 뿐이었다.

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의 1차 청문회에 출석한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사진 오른쪽부터)이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수치심은 사회적인 맥락과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매우 문화적인 감정이다.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는 공동체가 지정해주며, 타인의 시선은 우리에게 그 기준을 내면화하게 한다. ‘부끄러워할 만한 일’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재벌 총수들이 무능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우리와 사회적 약속의 장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문법이 작동하는 장에서 살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를 규율하고 있는 이 세계의 가치는 저들에게 아무런 행동의 지침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재벌 총수들의 전시된 무능과 뻔뻔함은 상징적이다. 평등, 능력 본위, 합리성 등을 내세우며 세계에 등장한 자본주의가 처절하게 실패하여 완전한 판타지로 휘발되었다는 것을 ‘한국 자본주의의 리더’인 그들이 몸소 보여주었다. 대물림되는 무소불위의 계급이 상존하는데 ‘개, 돼지들의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능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법망의 공백 안에 몸을 숨겨 어떻게든 당장의 곤란함을 피해가면 그만이다. 이 하루만 잘 버티면 영원과도 같은 부와 권력이 그들 앞에 있다.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이나 명예 따위, 중요할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역설적으로 스스로 ‘개, 돼지’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들의 무능을 손가락질하면서 이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의를 공고히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기꺼이 무능함을 선택한 자들이 노동자들에게는 온갖 종류의 ‘스펙’과 자기계발의 신화를 강요하는 각자도생의 담론을 생산하고 있음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무능이 오히려 위세가 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예컨대 이재용 부회장의 얼굴에 때때로 떠오르던 ‘교활한 썩소’는 바로 이런 이율배반이 흘러나오는 틈새였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 우리를 구속하는 ‘유능함’이라는 주술로부터 벗어나되, 그들에게는 무능을 가장한 부정(不正/否定)에 대한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눈앞에서 봉건적인 계급제가 근대적 자본주의의 탈을 쓰고 부활한 현장을 보고 있다. 정유라가 ‘부모의 돈도 실력’이라고 말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실력’이라는 말을 봉건적 언어로 왜곡했다. 이는 그들만의 문법이다. 우리는 그들의 문법이 우리의 문법을 침해해 오염시키는 것을 용인해선 안된다.

수치심은 여성, 장애인, 유색인종, 동성애자 등 사회적으로 규정된 ‘정상성’에서 벗어난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감정이지만, 동시에 시선을 자기 내부로 돌리고 성찰의 기회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하는 문명의 감정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즉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한다.

수오지심은 모멸감과는 또 다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그의 아내가 청문회 후 드러냈다는 감정은 모멸감이었다. 모멸감은 억울함과 분노, 짜증 등을 동반한다. 그들은 모른다. 그들의 일생이 수치의 기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기록 앞에서 모멸감을 느껴야 할 것은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이 모멸의 시대를 뒤집을 봉기의 시공간을 열었다. 이 혁명의 시공간이 그들에게 수오지심을 가르칠 수치심의 학교가 되기를 바란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