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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생각한 지 오래다. 십대 후반이었을까 아니면 이십대 초반이었을까. 아무튼 철들고 주위를 둘러보고 난 뒤, 긴 한숨 끝에 셈해본 내 미래는 그다지 가망이 없었고 지금 유행하는 ‘이생망’의 선언을 비수처럼 품고 주저앉았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건 아마도 딱히 부와 권력으로부터의 소외의식이라기보다는 ‘인생은 고해이다’라는 수준의 탈유년의 감각이었으리라.

그런데 문제는 ‘이생망’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받아들였다고 해도 특별히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이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묘비명을 둘러쓰고 죽은 척해도 또 다른 태양은 뜨고 사람들은 분주하고 세상은 무표정하다. ‘너는 망해라’라고 비웃듯 세상은 더 윤기 나고 타인들은 더 분주히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 아닌가. 더 큰 절망과 심술이 미움을 만들고, 그 미움이 타인보다는 스스로를 향해 자멸과 자폭을 일삼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이 비장한 몰락의 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냉혹하다는 것이다. 나의 ‘정신승리법’(혹은 정신몰락법?)과 무관하게 다음 순간은 어김없이 닥쳐오고 공평무사하게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그 역행의 시절 어느 날 니체의 아모르 파티를 만났다. ‘운명애’라고 번역되는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즐거운 지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최대의 무게-어느 날 혹은 어느 밤, 한 악마가 가장 적적한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네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 다음과 같이 네게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네가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다시 한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너의 생애의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일들이 다시금 되풀이되어야 한다. 모조리 그대로의 순서로 되돌아 올 것이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아찔했다. ‘지금 생이 한순간도 달라지는 것 없이 모조리 그대로의 순서대로 되돌아올 뿐 아니라 수없이 되살아야 된다고?’ ‘죽음조차 허용되지 않고, 다음 생도 없다니?’ 맙소사, 그것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예!’라고 답해야 한단다. “생이여, 다시 한번”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운명애이고, 허무를 넘는 진정 강인한 자라는 것.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생망’ 그대로의 생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라는 권고가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 위해, 즉 수백번, 수만번 다시 반복되어도 될 만큼 생을 긍정하기 위해 매순간 최선을 다하여 최종적인 삶인 것처럼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이것이 다시 한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가로 놓일 것이다! 아니면 이 최종적이요 영원한 확인과 봉인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 너는 얼마만큼 너 자신과 인생을 사랑해야 할 것인가!”라는 니체의 말을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또다시 새해이다. 이번 정권이 망했어도, 이번 생이 망했어도 시간은 굳건하고 가차없다. 찬란한 몰락 따위는 없고, 그러니 기적 같은 새날도 없다. 지지부진한 하루와 또 다른 지리멸렬한 하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아모르 파티의 철학은 종말론적 사고, 내세에 대한 기대는 물론 현생에서의 환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 환상을 말이다. 우리를 구원해 줄 백마 탄 왕자도, 영웅도, 메시아도, 도깨비도 없다. 둘러보면 모두 조금씩 찌그러져 있고 조금씩 부족한 이생망들이다. 그들만이 현실이고 희망이다. 그러니, 어디 멀리서 동아줄 타고 내려오는 글로벌 리더 따위에 다시 속지 말자, 권력자의 개과천선 따위, 율사의 정의 구현 따위 믿지 말자. 결국 언제나 그렇듯 우리들의 결기어린 목소리와 행동만이 정직하게 우리에게 응답했다.

지난해 마지막으로 읽은 <소태산 평전>은 ‘혁명도 아닌, 초월도 아닌 다른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의 성자, 후천개벽의 길이고 그것은 이생망의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금 나와라 뚝딱!’이 아닌, 천지개벽이 아닌, 후천개벽의 길, 그것이 2017년에도 여전히 타오를 촛불의 길, 촛불에 담긴 영성의 빛이라고 나는 믿는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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