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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맡에 두는 책은 그냥 놓아두기만 하기가 십상이다. 마음은 빤하고 표지만 닳았다. 늘 머리를 들고 다니면서도 그 머리를 잘 쓰지 못하는 건 다음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절기에 유념해서 몸의 윤곽에 꽉 맞추고자 하였다.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24절기를 쓰고 외웠다. 망종까지는 그런대로 껴안았는데 그 이후론 제대로 챙긴 적이 없다. 삼계탕을 먹어주어야 한다는 말복(은 24절기에 속하지 않는다) 때 힐끗 보고 또 까맣게 까먹었다. 경자에 이은 신축의 간지를 짚어보다가 겨우 생각이 났다. 저무는 해의 끝자락에서 달력을 바꾸며 확인하니 소한이 지척이다. 나는 날(日)의 생리를 모르고 살았구나. 가까이에 두었지만 이처럼 놓치는 건 머리의 안팎을 구별하지 않는다. 왜 이리 각성은 멀고 망각은 가까운가.
몇 해 전 육십령에서 출발해서 남덕유산에 올랐다. 육십령은 경상남도 함양과 전라북도 장수의 경계이다. 깔딱고개를 오르는 동안 나의 발길이 가위처럼 두 도(道)를 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미봉 지나 더욱 가파른 길을 치고 올라 정상에 서서 멀리 내 고향 쪽의 산세도 살피며 오늘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저렇게 다른 물정과 서로 어긋나는 사투리의 전라와 경상을 힘겹게 끌어다 천의무봉하게 바느질하는 게 육십령이 아닌가. 그 경계에서 한땀 한땀 피어난 건 솔나리, 등대시호 등의 호기로운 꽃들. 전라의 끝에서 경상은 시작되고, 또 경상의 끝에서 전라로 살아나는 작은 발견을 한 셈이었다.
또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된다. 머리맡의 책에도 예외가 있다. 가끔 내 한숨소리를 책갈피로 불러들이는 쉼보르스카의 시집이다. 비근한 일상에서 주운 소재를 쉬운 말로 가지고 놀았을 뿐인데 한 가마니의 소금 같은 독후감을 남긴다. 논어에 나오는 <절문근사>의 한 경지가 시쓰기에 적용된 사례가 아닐까. 그 흔한 발밑의 돌멩이가 어느새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로 도약하는 시들. 그게 좋아서 내 손끝이 자주 가닿는 그 책은 제목도 시작과 끝,이 아니라 ‘끝과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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