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궁합을 맞춰 문장 안에 감쪽같이 섞인다. 우리글은 끝까지 다 읽어야 그 방향을 알려준다. 배의 키처럼 서술어가 뒤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한문은 한 글자마다 각자 독립한다. 더듬더듬 뒤늦게 한문을 익히며 드는 생각. 한문에서 부정과 금지를 나타내는 건 非(비), 不(부), 弗(불), 無(무), 未(미), 莫(막), 毋(무), 勿(물) 등이다. 이들은 초성의 음가가 모두 미음이거나 비읍이다. 왜 이들은 ‘몸’이나 ‘밥’처럼 묵직하게 문장의 처음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일까. 또한 한문에서는 부정문이 왜 이리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일까.

부정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니 不’에 대해 생각해 본다. 不은 꽃잎을 잃고 꽃받침만 남은 것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한다. 간단해서 더 어려운가. 공책에 써보는 不은 초보 나무꾼이 지게에 받쳐놓은 작대기처럼 어쩐지 어설프기만 하다.

지난해 가을 이곳저곳의 꽃산행에서 코스모스 씨앗을 더러 모았다. 올봄 비 오는 날을 골라 사무실 화단에 뿌렸다. 코스모스의 첫 개화는 감격이었다. 내가 키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코스모스와 눈을 맞추며 많은 우울을 견딜 수 있었다. 얼마 전 올해의 씨앗을 받는 동안 어김없이 바람이 불었다. 바짝 마른 씨앗은 꽃받침마저 아낌없이 주고 ‘대궁’만 도톰하게 남았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는 지금 ‘不’자를 이정표처럼 허공에 적고 있는 중!

가양대교 건설 현장을 보며 출퇴근하던 적이 있었다. 상판을 올리기 전 강물에 죽 늘어선 육중한 기둥이 ‘不’자를 빼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리는 물론 이 세상을 떠받치고 지탱하는 힘은 바로 저 ‘아니 不’들의 위력!

오늘도 가양대교를 건넌다. 흐르는 강물과 가는 계절을 다리 위에서 헤아리며 짧은 글 한 편을 지어보았다. “노 저어 보았나/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돛단배 타고 노 젓는 건/ 몸에 있는 힘을 끄집어내서/ 물에 不자를 쓰는 것/ 아니, 아니, 아니/ 쓰자마자 지워지는 글자들이/ 우리를 자꾸 강 건너 그 어디로 데려다준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