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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대표>는 2009년 여름에 개봉했다. 주인공 밥(하정우 분)은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엄마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와 국가대표가 됐다. 태극마크를 단 건, 아파트가 필요해서다. 금메달을 따면 아파트가 생긴다고 믿었다. 귀화해 차헌태로 이름을 바꾼 밥은 “그러니깐 엄마, 조금만 기다려. 내가 올림픽 나가서 내가 메달 따가지고 내가 아파트 사가지고 내가 갈 테니깐, 무조건 기다리고 있어”라고 목놓아 외쳤다. 소년 가장 강칠구(김지석 분)는 할머니와 동생을 돌봐야 했다. 금메달을 따면 군대를 안 가도 된다. 1차 시기에서 다리를 다쳤다. 대신 경기에 나선 동생 봉구(이재응 분)가 주저하자 뺨을 때리며 외쳤다. “뛰어, 이 새끼야. 니가 뛰어야 내가 군대를 안 갈 거 아냐!”

영화 <국가대표>

영화의 배경은 스키점프다. 건물 20층 높이에서 출발해 아무런 도구 없이, 양발에 신은 스키에 의지해 하늘을 난다. 스키점프 센터에 따라 나는 길이는 달라지지만 남자 라지 힐 종목 세계 최고 기록은 250m를 넘는다. 하늘을 나는 시간은 8초에 육박한다. 라이트 형제가 자신들의 첫 비행기로 난 시간은 12초, 거리는 36m였다.

글라이더의 날개 역할을 하는 스키는 크고 길수록 유리하다. 중력에 반하는 종목이기 때문에 몸무게는 가벼워야 유리하다. 1998년 일본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 일본 대표팀은 가벼운 체중과 긴 스키로 금메달 2개, 은메달, 동메달 1개씩을 땄다. 선수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몸무게를 줄였다. 국제보건기구(WHO)가 규정한 건강한 체질량지수(BMI)에 한참 모자라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스키점프는 멀리 나는 정도를 겨루는 종목이지만, 점점 줄어드는 몸무게는 선수들의 건강을 위협했다. 국제스키연맹은 몸무게를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선수가 사용할 수 있는 스키의 최대 길이는 신장의 145%다. 대신 최대 길이 스키를 사용하려면 BMI(몸무게/키의 제곱) 지수가 21 이상이어야 한다. BMI가 0.125 모자랄 때마다 사용 가능한 최대 스키 길이가 0.5%포인트씩 줄어든다.

20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종목이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는 착지자세가 중요하다. 다리를 살짝 벌리고 한쪽 무릎을 구부리면서 착지하는 자세가 가장 충격을 덜 받는다. 오스트리아의 지역 이름을 따서 ‘텔레마크 착지자세’라고 부른다. 착지자세를 아예 규칙으로 정했다. 다리를 지나치게 넓게 벌리거나 무릎을 제대로 구부리지 않으면 감점 대상이다. BMI에 따른 스키 길이 제한과 마찬가지로 선수의 안전을 앞세운 규칙이다.

스포츠의 규칙은 대개 해당 기술을 장려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피겨는 고난도 점프에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야구가 투수의 어깨·팔꿈치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 구속을 제한할 수 있을까. 스키점프는 누가 멀리 나느냐를 겨루는 종목이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규칙으로 만들어 제한했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안전은 스스로 지키라고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경쟁은 제한이 없다. 욕망은 미덕이고, 노력은 의무다. 건강과 안전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최저임금 인상의 취지를 위협하는 것은 법이 눈감고 있는 무시무시한 재산권과 그에 따른 임대료다. 비트코인 열풍 속에 “위험은 각자가 책임질 몫이니 내버려두라”는 목소리는 더욱 섬찟하다.

영화 <국가대표>에서 주인공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기대하지 마요. 나도 대한민국한테 기대하는 거 없으니까”라고. “말했잖아요, 찢어버리고 싶다고. 대한민국”이라고. 희뿌연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

머지않은 올림픽을 통해, 금메달의 환호가 아니라, 건강과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스포츠 정신이 조금 더 큰 울림을 갖길 바라는 건 지나친 기대일까.

<이용균 ㅣ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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