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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몇 번을 망설였다. 끝까지 볼 배짱도, 울지 않을 자신도 도무지 없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이었던 유시춘 선생 손을 잡고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까진. 유 선생은 시사회를 봤지만 후배를 위해 기꺼이 동행했다. 숨소리까지 고문당하던 그때와 두 번이나 마주하게 해 미안했다. “괜찮아, 뜨거웠던 한 계절이 내 인생의 정수였어. 살아서 이런 시절 봤으면 된 거지.”

몇 겹의 장면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박종철의 죽음과 49재, “종철아 아비는 할 말 없대이”, 이한열의 죽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의 폭로, 열사 26인을 호명했던 문익환 목사의 절규, 전국적 추모 투쟁을 관통하던 ‘그날이 오면’. ‘타이거 운동화 한 짝’은 군사정권에 맞선 청춘들의 사랑과 투쟁이었다.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유 선생은 화장실을 찾았고 난 돌아서서 포스터만 쳐다봤다.

세밑 주말 저녁, 눈송이가 흩날렸다. 한참을 걷다 발길 머문 커피숍에 앉았다. “<1987>은 보통사람들의 서사네요. 선과 악의 순간순간이 일궈낸 변혁 그 자체가 역사겠지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고개를 끄덕였다. 유 선생은 6·10항쟁 당일 아침 연행됐다. 구로경찰서에서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강동경찰서로 끌려갔다. 부채꼴 모양 유치장 앞에 붙은 유 선생 죄목은 ‘집시법 위반’. 반대쪽 유치장에 갇힌 여성들이 유 선생 죄명을 보더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 여성들의 박수를 들으니 ‘매운 계절의 채찍을 딛고 북방에 선’ 것처럼 울컥했다고 한다. 신민당사 점거 농성으로 일찌감치 서대문구치소에 있던 YH노조 사무장 박태연도 그립다고 했다. 유 선생은 여사 21사동 통풍구 위에 올라서서 6월항쟁을 들려줬다. 서울구치소 여사 ‘소지’(일본어로 ‘청소’)는 지금 살아 있을까. 구치소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뿐이었다. 그나마 정치범은 마지막 순서였다. 목욕물이 남았을 리 없었다. 한 ‘소지’가 유 선생에게 물 양동이를 건네며 몸을 돌려세우더니 “마, 세상 안 디비지겠나. 함 바까 보자”며 등을 밀어주는 게 아닌가.

눈발이 잦아들 무렵에야 우린 눈 얘기를 꺼냈다. “민주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눈송이처럼 떨어진 게 아니란 걸 젊은 친구들이 알았으면 좋겠어.” “그럼요, 알 거예요.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새 커피잔은 세 번 정도 비워지고 채워졌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유 선생이 눈치채길 바랐다. ‘그로부터’ 1년 후를 묻고 싶었다. <1987>의 1년 후 말이다.

혁명은 유토피아를 만들지만 혁명 스스로의 유토피아도 있다. 반동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항쟁의 반동은 너무도 잔인했다. 정치의 책임이 크다. 시민들이 열어준 민주주의를 오로지 권력게임의 도구로 활용한 탓이다. 1987년 대선의 노태우 후보 당선, 1988년 13대 총선의 지역주의 부활은 혹독한 대가다. 반면 노동자들은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1987년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은 직선제 쟁취로 수렴됐지만 그해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노동의 현실을 드러냈다. 노태우 정권에서 분신한 노동자 규모만 전체 정권의 84%를 차지한다(임미리 <열사, 분노와 슬픔의 정치학> 중).

87년 함성에서 2017년 촛불항쟁을 떠올리게 된다.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던 군사정권, 총구는 겨누지 않았지만 시민을 버렸던 이명박·박근혜 정권. 30년 전 촛불을 끄고 집으로 돌아갔던 우리는 30년 후 지금은 촛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 광장에 서 있다. 적폐청산, 비정규직 문제 등 시민들이 직접 제기한 사회 문제는 정치 의제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70%대 지지율은 다신 맘 편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일 테다. “그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아직 감옥에 있는 촛불항쟁 1년은 참 안타깝지.” “맞아요. 성장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달빛에 바랜 신화일 뿐이죠.”

<정치부ㅣ 구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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