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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시간을 쓰는 일

opinionX 2019. 2. 19. 11:04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헐레벌떡 들어온 한 사람이 기다리던 사람에게 물었다. “뭐하고 있었어?”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시간을 쓰고 있었어.” 순간, 귀를 의심했다. 시간을 쓰고 있다니, 평소에 잘 쓰지 않는 표현을 듣고 온 신경이 그 자리에 쏠리고 말았다. “시간을 어떻게 썼는데?” 내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들어온 사람이 물었다. 기다리던 사람이 방긋 웃으며 읽고 있던 책을 번쩍 들어 보였다. “시간 잘 썼네.” 대화가 오가는 동안, 주변에는 온기가 감돌았다.

얼마 후 나는 독서에 집중하기 어려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수선한 분위기 탓은 아니었다. “시간을 쓰고 있었어”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오기 전까지 시간은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이었다. 나 자신과 시간이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시간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은 손으로 단박에 움켜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만있어도, 집중해서 어떤 일을 해도 지금 이 시간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읽고 있던 책은 여전히 똑같은 페이지였다.

시간을 잘못 썼다고 자책하며 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허비하다’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헛되이 쓴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그렇다면 잘 쓴 시간은 또 어디로 가는가.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고 말 지금 이 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지금을 살고 있지만, 지금의 무게는 각자 다 다를 것이다. 그 무게는 진행하고 있는 일의 중압감, 함께 있는 사람과의 친밀도,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기대 등이 뒤섞여 결정될 것이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쓰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재화를 쓰는 일에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점에서 책을 사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은 돈을 쓰는 일이었다. 그때, 시간은 책이나 커피와 함께 따라오는 것이었다. 경험의 중심에는 언제나 시간이 있었다. 시간을 쓰지 않으면 경험치도, 지식도, 지혜도 쌓일 수 없었다. 항상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셈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시각에만 연연한 나머지, 그것을 아우르는 시간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간을 쓰는 일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중 하나를 고르고 그 시간 안에 나를 담는 일이다. 여가인 경우, 시간은 내가 쓰기 나름이므로 이때는 시간에 가담하는 것이 된다. 시간과 같은 편이 되어 좋아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산책을 하고 전시장에 가고 친구를 만나 요즘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보이는 나’가 감히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수행하기도 한다. 남몰래 춤을 배우고 만화책을 잔뜩 빌려와 키득거리며 밤새 읽을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진짜 나’를 찾는 일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시간은 때우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쓰는 일에는 늘 신중해야 할 것이다. 돈을 쓰는 일보다 마음을 쓰는 일에, 그 마음을 고이 담아 시간을 쓰는 일에. 시간을 잘 쓰면 그 시간이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근래에 아빠를 그리워하며 쓰는 시간은 참으로 귀하다. 아빠와 함께 산책하던 근린공원을 걸어갈 때마다 옆에 누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외출할 때는 혼자였지만 귀가할 때는 매번 둘이 손을 맞잡고 돌아온다.

나는 아빠가 앉곤 하던 벤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벤치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아빠와 함께하던 사계절의 색깔과 냄새를 기억하고 있어서 실로 다행이다. 아빠가 이름을 알려준 참빗살나무와 옥잠화를 발견하면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말없이 올려다보던 하늘에 오늘도 어김없이 달이 떠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도 있었다. 여름과 가을이 되면 꽃들이 추억을 상기하듯 다시 피어날 것이다.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느라 달은 매일 밤 떠오를 것이다.

쓰는 일에 대해 골몰하니 시간이 참 잘 갔다. 오래간만에 시간을 참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쓴 시간은 머잖아 단단한 기억이 되어, 뭉클한 추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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