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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멈췄다. 국민들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일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자괴감 때문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가지고도 박근혜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저지른 일은 국가의 기본을 철저하게 무너뜨린 것이다. 이러한 허탈감과 분노에는 여야, 진보와 보수, 세대, 지역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 모든 것에 앞서서 기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전부 무너졌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아름다운 헌법의 문구를 순진하게 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비선 실세가 이 정도까지 국정을 농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 수십 년을 성실하게 일한 관료가 입신양명까지는 몰라도 실세 눈 밖에 났다고 하루아침에 쫓겨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기업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통치자금으로 뜯길망정 적어도 실세 모녀의 사금고로 흘러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자식 뒷바라지를 남들만큼 못해줘서 명문대에 보내지 못한 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을망정 적어도 대학이 규정을 뜯어고치고 지도교수를 바꿔치워 가면서 실세의 자식에게 특혜를 주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무엇보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청와대가 국정의 컨트롤타워여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조차 의심받고 있다.

시민들은 촛불집회 26일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역광장에서 수원지역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민주주의 수원 공동행동’ 회원들이 촛불 문화제를 열고 “박근혜 퇴진” “박근혜 탄핵”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사람들은 탄핵과 하야를 얘기하고 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이 가능성을 보도했고, 며칠째 실시간 검색어 1·2위를 지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앞으로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추진한들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관료나 기업이 움직이겠는가. 그러니 사람들이 탄핵과 하야를 얘기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국가가 정권과 함께 침몰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다음이 중요하다.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도 1년4개월이나 남았다. 탄핵이 설사 국회 문턱을 넘는다 하더라도 헌재를 거쳐야 하니 몇 달간의 국정공백이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보여준 정치인 박근혜의 일관된 스타일로 볼 때 하야를 택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비서실장과 총리가 슬쩍 흘린 피해자 코스프레 후 봉합이라는 수순은 거대한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매우 높을뿐더러 성공한다 하더라도 1년4개월간의 국정공백을 불러올 뿐이다. 세간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공책을 동원한 반격에 대한 루머도 떠돌아다닌다. 이것은 그야말로 망국을 불러올 것이므로 그 정도의 합리성만은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고 있는 거국내각은 해법이 될 수는 있다. 노태우 정부 말기에 구성된 거국중립내각의 현승종 총리처럼 본인의 정치적 야심을 앞세우지 않으면서 여러 정치분파로부터 비교적 고른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원로들은 그나마 몇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성정으로 볼 때 이것도 역시 그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현승종 내각은 2개월간 선거관리만 하면 됐었지만 지금 만약 거국내각이 구성된다면 1년4개월간 실질적으로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차이점도 있다. 무엇보다 미세하게 변하는 청와대의 스탠스를 지켜보노라면 시간을 끌면서 여론이 식기를 기다리고 수석 몇 명 교체와 최순실 소환, 그리고 도통 진전이 없는 특검 혹은 검찰 수사의 수순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착각임이 드러날 것이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분노의 온도는 세월호 참사 때보다도 훨씬 뜨겁고 대다수 국민들에게 골고루 퍼져 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라던 노인과 대구·경북도 혀를 차며 오늘은 또 얼마나 충격적인 정권의 실체가 드러날지 8시 뉴스를 손꼽아 기다린다. 정치무관심층으로 꼽히던 직업군의 사람들도 이게 무슨 나라냐며 수치심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대학을 필두로 수많은 사람들이 시국선언에 나서고 있다. 실로 20여년 만에 대동단결하여 탐사보도를 이어가고 있는 언론은 아직도 넉넉한 실탄을 쌓아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설 것이다. 29일로 예정된 탄핵집회가 그 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 때의 집회구호는 ‘이명박 OUT’이었지만 이번에는 앞에 한 줄이 더 붙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일갈이다. 이 짧지만 강렬한 물음에 대통령은 “이게 나라다!”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답할 수 있어야 봉합이 가능하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이 이것을 나라라고 부르기는 불가능하다. 편 가르기를 통한 보수 결집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보수고 진보고 있는 것이니까. 구중궁궐에서 측근들에게만 둘러싸인 대통령이 과연 얼마나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다시 광화문을 정권과 국민이 충돌하는 격렬한 전장으로 만들 것인가. 그 격렬한 전장에 이번에는 컨테이너 대신 무엇을 쌓을 셈인가.

장덕진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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