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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 세간에 회자된 모든 의혹이 속속 근거 있는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권력서열에 관한 얘기, 연설문 수정 의혹, 십상시와 팔선녀 등등. 비서실장만 몰랐던 듯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못 박아 부정했지만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명명백백한 증거가 노출되기까지. 역사의 시계가 ‘잃어버린 몇 년’ 정도가 아니라 지금 우리를 봉건시대로 되돌려 놓고 있다. 대통령은 최순실 관련 의혹 제기를 두고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로 깎아내리고, 국민과 언론의 근거 있는 의혹 제기를 비방과 유언비어, 괴담으로 매도하고 불법과 무질서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여느 피의자처럼 물증을 들이대니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에게 연설과 홍보 정도 의견을 구했다는 선에서, 사과 시점까지 드러난 물증에 맞는 맞춤형 사과였다. 그러나 물증은 거기까지가 아니었다. 최씨의 비선 비서실은 의견을 구하고 옷을 골라주고 연설문을 수정한 정도가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쳐 손댄 흔적이 드러났다.

JTBC가 최순실씨 컴퓨터에서 입수했다고 24일 공개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제목 옆에 ‘신문용‘ ‘재수정’ ‘프롬프터’ 등이 쓰여 있어 대통령 발언 이전 받은 초고임을 알 수 있다. JTBC 제공

대통령의 사과로 통치자로서 능력 없음이 드러났다. 보좌진이 정비되지 않은 시기까지 절친의 도움을 받았다는 대통령의 해명은 준비 안 된 대통령임을 실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청와대 비서실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하고 비선의 도움으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대한민국을 이끌어 왔기에 지금 나라 꼴이 이 모양이었던 것이다.

국민에게 전할 대통령의 말씀이 아무런 공적 직책도 없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그저 수십 년 친하게 지내온 사람에 의해서 주물러졌다는 사실에 온 국민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우리가 들었던 대통령 연설문이 공적 시스템에 의해서 완성돼 대통령의 입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었다. 국정운영 능력이나 시스템은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비선 실세의 의견을 듣고 마련한 자료를 수석비서관회의나 국무회의에서 일방적으로 읽어 가면 고개 숙여 받아 적기 바빴던 장면이 국정운영의 모습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 말을 따르라는 봉건영주의 독주는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행사하는 민주공화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과 정계입문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친한 몇 사람에 둘러싸여 불통 대통령이 되어갔던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청와대 비서실이 그들의 활동공간인 강남으로 이전한 모양새다. 대통령 보고 자료가 전달돼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비선모임이 열리고 행정관들이 드나들고 상왕 실장인 최씨가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비선 청와대 비서실이었다. 대통령 사과 당시 도열한 비서실장을 포함한 수석비서관들은 이름뿐이었다. 국민이 준 권력을 사유화해 비선에게 국정운영을 맡긴 꼴은 대통령이 즐겨 쓰던 ‘비정상’ 바로 그 자체였다. 이토록 비선 실세가 호가호위하도록 방조한 것은 대통령이다. 국정을 농단하도록 힘을 건네준 이도 대통령이다. 특별감찰관을 해임시킨 이유가 비선 실세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민정수석조차 비선 실세의 손에 의해 추천되고 대통령이 받아들였다고 하니 최씨를 포함한 비선 실세들은 날개를 단 듯 국정을 농단했다. 그러고도 최씨와의 관계조차도 부인하고 최씨와 관련한 의혹 제기를 비방과 폭로성 발언, 괴담 수준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언어는 단 한마디도 신뢰를 얻을 수 없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비정상이 난무하는 비상시국이다. 비선 실세를 키워 불법과 무질서가 판칠 수 있도록 부추기고 방조한 장본인이 바로 청와대와 대통령임이 드러났다. 대통령은 경찰의 날 축사에서 ‘불법과 무질서가 용인되면 사회의 발전도, 미래도, 희망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의 첫 적용대상자가 청와대와 대통령이 될 상황이다. 이 사태를 그대로 덮어두고 책임 있는 자의 사법적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발전도, 미래도, 희망도 없다.

국가지도자와 정치인은 신뢰를 먹고 산다. 법을 위반하면 법적 책임을 물어 교도소로 보내야 하고, 국민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유권자의 심판을 받거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치적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무늬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 불신임은 정점으로 향하고 있다. 국회 청문회를 통하든 특별검사의 수사에 의하든, 비상거국내각을 구성하든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틀 안에서 비정상이 정상화돼야 한다. 먹고 살기 바쁘고 살인적 물대포도 두려운 시민들을 더 이상 아스팔트로, 광장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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