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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사태는 한국 경제의 대표선수들인 대기업들이 새로운 환경에 대처해서 어떻게 변화해 나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소위 재벌 체제의 고질적 문제인 지배구조 문제를 생각해보자. 재벌이라 불리는 대규모기업집단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계열사의 수가 늘어나고 규모가 커지면서 부작용도 동시에 가지게 됐다. 대표적인 것이 계열사 간 출자를 통해 소유주 일가의 지배력을 부풀리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돈을 투자한 만큼만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최대 주주는 소유권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한국의 대규모기업집단은 이 의결권 부풀리기의 정도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지배구조 문제가 계속 제기돼왔다. 일반 주주의 이익을 침해할 뿐 아니라 과도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최대주주이자 경영자의 판단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예측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언론 보도에 의하면 광윤사-일본 롯데홀딩스-한국 롯데호텔-국내 계열사로 이어지는 지분구조에서 광윤사의 지분을 더 많이 차지하는 사람이 롯데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경제의 핵심 동력 중 하나여야 할 롯데그룹을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광윤사라는 회사는 직원이 서너명에 불과한 정체불명의 회사라고 한다. 일부 기업들에서 지배권 부풀리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2003년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이미 경험했듯이, 이번에도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지분대결 형태로 갈 경우 일부 롯데그룹 계열사들의 주가는 롤러코스터를 탈 것이다. 과거 SK-소버린 사태나 최근 삼성-엘리엇 사태에서 보듯이 자본시장 국제화와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인해 지금의 구조는 점점 더 많은 리스크를 가져오고 있다.


롯데그룹의 후계 구도를 놓고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0일 일본을 방문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13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_윤동진 기자



둘째는, 혁신의 부재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혜택 중 하나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끊임없는 혁신을 가능케 해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지난 10여년간 극소수의 최상위 기업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이루어낸 혁신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과거 개발연대는 물론이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해도 혁신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한때 30대 재벌을 말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10대 재벌로 줄어들더니 최근에는 삼성과 현대기아차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아니게 됐다. 한국 경제의 대표선수들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대기업의 골목상권 장악과 같은 문제도 혁신의 부재와 깊이 연관돼 있다. 대기업이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나간다면 골목상권에 눈을 돌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미 커질대로 커진 상태에서 혁신이 줄어들면 골목상권이라도 장악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 이렇게 본다면 혁신은 없고 덩치만 커진 중하위권 기업집단들이 향후 한국 경제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혁신하는 기업이 보상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로, 기업문화와 세대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서구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최대주주의 가족이 대를 이어가며 경영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해 가족주의의 전통이 강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최대주주의 자녀들이 가업을 이어 경영자가 되려고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여기에는 지배권 부풀리기가 가져다주는 실질적 이득과 가족주의의 문화적 관념이 섞여 있다. 그러나 가족경영은 대체로 3세대 혹은 늦어도 4세대 즈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 외국 기업들의 전례이자 일부 한국 기업들의 경험이다. 창업자로부터 3대 혹은 4대가 지나면 가족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고 그들 내부의 이해관계도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상위권 그룹들은 세대적으로 볼 때 바로 이 시점에 도달해 있다.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이 점점 많아질 것임을 예측하게 하는 문화적·세대적 배경이다.

지배구조 관점에서나, 혁신이 줄고 있다는 측면에서나, 문화와 세대의 단계에서 볼 때 한국의 대기업들은 초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로 나아가는 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소수의 기업들은 나름의 대비를 해나가고 있지만 상당수의 기업들은 이런 변화를 미루기만 하고 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창업자가 사라진 상태에서 가족 간에 갈려있는 이해관계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문제들을 과감히 해결하고 제대로 뛸 수 있는 기업들은 적극 지원하고 과거 패러다임과 이해관계에 갇혀 꼼짝 못하는 기업들은 솎아내는 정책의 개입이 필요하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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