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며칠 전 신년 국정연설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부자증세를 통한 중산층 살리기를 역설했다. 자본이득세 세율을 올리는 등 앞으로 10년간 345조원의 세금을 더 거두어 중산층, 서민을 위한 보육이나 교육에 투자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연설하는 그의 목소리는 힘찼지만 실현 가능성은 의문이다. 최근 선거에서 상하 양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부자증세에 호락호락 동의해줄 것 같지 않고, 대통령 임기도 2년밖에 남지 않았다.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좀 일찍 서둘지.

오바마는 2008년 미국 금융위기와 공황이란 비상사태를 맞아 ‘변화’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재선에도 무난히 성공했다.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자란 오바마에게 거는 기대가 자못 컸으나 6년 동안의 실적은 의료보험 개혁 이외에는 내세울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집권 초기부터 개혁적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인물들을 기용하더니 과감한 개혁을 못하고 결정적 순간에 좌고우면해왔다.

80년 전으로 가보자. 루스벨트는 대공황이란 비상사태를 배경으로 ‘변화’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2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집권 뒤 실제로 미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소득세, 상속세를 대폭 인상하는 등 부자증세에 적극적이었고, 노사 간 대등한 협상을 할 노조의 권리를 인정했고, 최저임금제와 빈곤가구지원법을 도입하여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최근 나온 피케티의 책을 보면 미국의 소득세 최고 세율이 지금은 유럽보다 낮지만 한때는 유럽보다 높았으며, 심지어 최고 90%를 넘는 믿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갔다고 하는데, 부자증세는 주로 뉴딜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뉴딜을 추진하면서 루스벨트는 의회에서 발목 잡는 공화당, 그리고 개혁입법에 위헌 판결을 내려 찬물을 끼얹은 대법원과 끊임없이 싸웠다.

결과적으로 뉴딜은 미국을 위기에서 구출해냈고, 국민은 루스벨트의 개혁에 대해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란 영예를 안겨주었다. 비슷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비슷한 선거 공약을 내걸고 집권한 두 명의 민주당 대통령의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다. 부잣집 출신의 루스벨트는 과감한 개혁을 한 반면 가난한 흑인 가정 출신의 오바마는 개혁을 못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흥미 있는 사회학적 연구 주제가 될 만하다.

한국으로 와보자. 2년 전 대선에서 문재인, 박근혜 후보는 모두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 범위와 강도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방향에서는 일치했다. 그만큼 시대적 요구였다는 뜻일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란 실은 루스벨트의 뉴딜 개혁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흔히 뉴딜을 후버댐으로 상징되는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대기업의 횡포를 규제하는 규제의 제도화, 그리고 약자들을 보호하는 복지의 제도화가 뉴딜의 본질이다. 우리나라의 2년 전 대선의 쟁점도 바로 경제민주화=규제의 제도화, 그리고 복지국가=복지의 제도화였으니 80년 전 미국과 흡사한 광경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 대통령이 할 일은 명백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성과는 미미하다. ‘갑’의 횡포는 여전하고, 복지국가는 요원하다. 새누리당과 정부는 복지국가를 하겠다고 말은 하는데, 한사코 부자증세를 거부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증세 없이 복지국가 하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좋아하는 창조경제인가? 지하경제 투명화를 통한 세원 발굴만 고집하는데, 이는 이명박 정부에서 이미 시도해봐서 아는데, 거기에 금맥이 없다는 것이 판명됐다. 박근혜 후보는 매년 25조원 정도의 복지 지출 증대를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이런 큰돈은 부자증세 말고는 나올 데가 없다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국무위원들과 티타임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 뒤로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이 보인다. _ 연합뉴스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 파동, 교통범칙금 압박, 앞으로 올 자동차세, 주민세 인상, 모두 서민 호주머니 털기로서 큰 재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해답은 부자증세밖에 없고, 우리나라의 3대 조세인 부가가치세, 소득세, 법인세 모두 국제적으로 비교할 때 증세 여지가 있다. 큰길을 두고 자꾸만 샛길로 가는 정부, 여당은 하루빨리 큰길로 돌아오라. 미적거리다가 실기한 오바마를 닮지 말고 과감한 개혁으로 일관한 루스벨트를 거울로 삼기 바란다.


이정우 | 경북대 교수·경제학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