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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메르스 사태가 진정되어가는 모양새다. 지난 두 달간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메르스 정국’이라는 단어를 당연하다는 듯 사용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메르스 정국이라고 부를 만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메르스 정국이라고 하려면 초미의 관심사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메르스가 정국의 흐름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거나 메르스를 중심으로 정치적 균열이 만들어졌어야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을 터인데,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메르스 사태가 정치적인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무엇보다 대통령 지지율의 하락 때문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와 비교해보자. 광우병과 메르스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신종 질병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 이에 대한 정부의 둔감성, 그로 인한 지지율 하락 등이 그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사태 직전 40%에서 최저 29%까지 하락했다. 촛불집회 때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48%에서 16%까지 떨어진 적이 있다. 이번과 견줄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지지율 하락의 발단이 된 정부 책임의 크기를 비교해보자. 당시 한국에는 광우병 발병 사례도 없었고, 당연히 인간 감염도 없었다. 이번에 한국에서는 1만6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격리되었고, 183명의 확진자와 33명의 사망자(2일 오전 6시 현재)가 발생했으며,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메르스 발병국가가 됐다. 당시에는 많게는 수십만명이 참여하는 촛불집회가 두 달 이상 지속되었지만 이번에는 집회 같은 것도 없다. 정리하면, 그때에 비해 정부의 책임은 훨씬 더 크고, 정부를 비판하는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동원은 별로 없었거나 실패했으며, 책임의 크기에 비해 정치적 타격은 적다는 것이다. 게다가 메르스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청와대발 당·청 갈등이 불거지자마자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오히려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주요 정치인들의 지지율 변화를 봐도 마찬가지다.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지지율이 약진한 것이 화제가 되었지만, 최근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박 시장의 지지율과 가장 밀접하게 연동된 정치인은 대통령이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이다. 즉 박 시장의 약진은 대통령보다 문 대표에게 더 많은 타격을 주었다는 뜻이 된다. 적어도 메르스가 여야 정치균열의 핵심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질병의 정치화라기보다는 단순히 정부의 무능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야당은 오히려 메르스 사태를 메르스 정국으로 만드는 데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4일 밤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메르스 관련 긴급 브리핑을 갖고 있다._경향DB



박 시장의 한밤 기자회견 등 과잉(?)대응이 바로 메르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증거라는 주장도 나온다. 박 시장의 긴급 기자회견이 있었던 6월4일의 시점에서 메르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전염병의 대유행에 대한 사회적 공포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작은 확률이라 하더라도 결과가 치명적일 수 있다면 초기에 최대한의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 의사결정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의 산업화를 이룩한 방식이기도 하다.

박 정희 전 대통령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중화학공업화에 상상을 초월하는 과잉(?)투자를 쏟아부었다. 한국에 호의적이었던 세계은행조차 비웃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에 찬사를 보냈던 정치학자 찰머스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이끄는 장군에게 폭력의 효율성을 따지겠는가?” 맞는 말이다. 산업화도, 메르스 대응도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다. 효율적으로 지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이기는 것이 백번 낫다. 그러니 과잉대응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그저 흠잡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중앙정부보다 더 나은 대응을 선보였던 지자체장들에는 여야가 섞여 있다.

아무리 봐도 지금까지 메르스 정국은 없었던 것 같다. 이번 사태의 교훈은 오히려 이런 것이다. 위험사회에서 누가 더 진심을 다해, 그리고 유능하게, 국민 전체를 보호하려고 하는가가 커다란 정치적 파급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불통과 무능 앞에서는 콘크리트 지지율조차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야 한다. 야당은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낙관할 일이 아니다. 메르스 사태를 메르스 정국으로 만들고 야당 지지율 상승으로 견인해내지 못한 데서 야당의 무능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어느 정도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험사회에서는 누가 더 유능하게 국민을 보호할 것인가가 정치균열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메르스 정국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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