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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박투톱의 등장 이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청와대를 향해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 첫 타깃은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증세 없는 복지’이다. 작년 10월 개헌론에 불을 지폈다가 하루 만에 후퇴한 지 100일밖에 안되었지만,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취임 후 처음으로 30%를 밑도는 지지율을 기록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이루어진 여권 내부로부터의 타격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를 본격적인 레임덕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안을 레임덕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는 이제 벗어날 때도 되었다. 정권 출범 이후 아마도 처음으로 당이 당·청관계를 주도하는 듯한 모습을 한번 보였다고 해서 곧바로 레임덕 여부에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삼권분립 국가에서 입법부의 다수당인 현재의 여당은 정책 논의를 주도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를 자꾸 레임덕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여당은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본연의 역할을 하기 어렵고, 청와대는 설사 당의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류를 수정할 기회는 사라지고 국민들만 골탕을 먹게 된다.

청와대도 대선 공약이었다고 해서 무조건 증세 없는 복지를 고수하는 것이 곧 대통령의 신뢰 이미지를 지키는 것이라는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킬 수 없는 공약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솔직히 공약을 만들 때부터 못 지킬 것을 알았던 공약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대선 당시 공약집을 검토한 전문가라면 누구나 다 알았다. 그럼에도 증세 없는 복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세금이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뇌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청와대는 최근 급격히 낮아진 지지율이 담뱃값 인상이나 연말정산 파동처럼 국민들이 실질적인 증세라고 느낄 사안들에 있다고 보고 있을 것이다. 이런 마당에 내놓고 증세까지 거론한다면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증세를 하지 않을 방법은 정말 있을까. 거의 모든 전문가들의 의견은 ‘없다’이다. 1~2년 정도 짧은 기간 잠깐 모면할 방법은 있을지 몰라도 길게 봐서 증세를 피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여러 이유들이 있으나 고령화 하나만 예로 들어도 분명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피부양 고령인구는 늘어나고 있고 경제활동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무슨 수로 증세를 피할 것인가?

여당 내에서는 증세 논의에 앞서 복지의 선별적 요소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야당은 부자감세나 법인세감면 철회가 우선이라는 주장도 내놓는다. 일리 있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세금문제를 대선 공약이라는 신성불가침 영역에서 봉인 해제해 장기적 전망하에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중요한 과제에 비하면 하위영역의 고려사항들일 뿐이다. 피할 길 없는 증세를 잠깐 미룬다는 것은 결국 다음 정부에 떠넘긴다는 뜻이 되는데, 그때가 되면 상황이 더 악화돼 지금보다도 훨씬 더 급하게, 졸속으로, 더 많이 조세정의를 훼손하면서, 더 큰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키면서 하게 될 것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6일 국회에서 열린 주요당직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진 것은 실질적 증세라는 ‘오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꼼수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불가능할 것이 뻔한데 증세는 없다는 입장만 고수하는 것이 신뢰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세금을 둘러싼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정책 논의의 장을 열어주고 조세정의와 투명성이라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면서 그 논의를 관리해나가는 것이 훨씬 더 큰 신뢰를 줄 수 있다.

정치적 주도권 싸움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여야 간에도 모처럼 세금을 둘러싼 합리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증세 문제를 포함해서 현재 한국에는 근본적인 전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현안들 여러 개가 쌓여있다. 한마디로 사회모델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5년 단임 정부의 한계와 정치적 득실 때문에 어느 것 하나 해법을 찾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해왔고, 그사이에 시한폭탄의 심지는 거의 다 타들어가고 있다. 국민들이 정치를 불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진짜 해결해야 할 우리 모두의 문제를 짐짓 외면하고 자신의 정치적 득실만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지를 철회하는 진짜 이유이다. 뻔히 불가능할 공약을 붙잡고 이번 논란을 레임덕의 시작이 될지 모른다고 민감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장기적 해법을 모색한 첫 정부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면 한국에 절실하게 필요한 사회모델 전환의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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