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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대법원장 재임 중 대법원에서 벌어졌던 여러 비상식적인 사건들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대법원장은 대통령과 단둘의 만남을 요청하였고, 그동안 법원이 정권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앞으로 어떤 ‘유익한’ 재판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해도 그렇다. 대법원장이 원했던 것은 상고법원의 신설이었고, 그가 그 대가로 내줄 듯 보여준 것은 사법의 공정성이었다.

권력이 사법권에 의해 정당하게 제한되는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진실조사와 책임자 처벌 말고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도대체 상고법원을 설치하는 것이 대법원장에게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중요하였던 것은 단순히 하나의 법원을 설치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법원 권력의 정체성을 바꾸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신과 신군부의 독재정부 시절 대법원은 절망한 사람들과 정의를 외면하였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민주주의자를 처벌하는 세력에 조용히 협력했던 사법은 국민들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주의가 도래하였고, 개헌을 통하여 헌법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새로 설립된 헌재는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어느덧 대법원의 위상을 위협하게 되었다. 대법원의 무리한 시도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최고법원으로서의 권위를 부활시켜야 하고, 차제에 헌재를 대법원의 산하기구로 통합시켜야 한다. 최고로 중대한 문제에 관해서만 재판하는 법원으로 정체성을 바꾸어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해서 통상적 중요도의 사건을 처리해줄 다른 법원이 필요하였고, 그 역할로 계획된 것이 바로 ‘상고법원’이다. 대법원이 모든 것을 주고라도 얻어내려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국민의 신뢰를 잃었기에 권력을 잃었다면 우선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여야 했고, 공정하고 독립된 재판으로 신뢰를 회복하여야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절차와 과정을 건너뛴 채 최고 권력자와 직접 거래하려 했다.

가장 위험스러운 문제점은 우리의 권력구조가 그런 시도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대법원장의 권력이 견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정이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고, 대통령의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결심한다면 별다른 장애 없이 실행될 수 있었다. 권력의 은밀한 거래를 시도한 것이 과연 대법원뿐이었을까? 대법원 사태는 고장난 권력장치를 드러내는 빙산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지방선거가 끝났다. 그동안 불량배 흉내를 내며 모든 변화에 반대하던 야당은 유권자들의 뜨거운 심판을 받았다. 보수야당의 여러 가지 잘못된 판단 가운데 가장 어리석었던 것은 개헌작업에 대한 비협조와 태만이었다. 개헌은 당장의 정치적 이해와는 거리가 먼 장기적 결정이다. 합리의 정치가 이뤄지도록 스스로 주도하고, 설득했어야 할 야당이 태업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 것은 정치인과 정당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이었다.

모든 정치세력들이 지혜를 모아 개헌을 다시 이야기할 시점이다. 새로운 개헌작업을 위해서 정치권에 당부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 개헌을 하는 이유와 목표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솔직하게 논의하는 것이다. 지난번 개헌논의는 가장 기초가 되는 이 문제에 관한 합의와 공감대가 이뤄지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어쩌면 시민들의 적극적 관심을 끌어내지 못한 원인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이번 개헌의 목표는 권력구조를 제대로 수리하는 것에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헌법에 아무리 멋진 것들을 규정해 놓는다 해도 큰 의미는 없다. 게다가 정치의 구체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헌법이 아니라 한 걸음씩 어렵게 성취할 정치의 역할이다.

완벽한 절망 속에서도 삶은 꾸역꾸역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 사람들은 남부 호숫가에 있는 헤렌킴제 성에 모여 헌법초안을 논의하였다. 위원들 가운데에는 심지어 나치에 협력했던 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모두가 패자인 상황. 그들은 비난하고 방해하는 대신 남아 있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엔지니어로서 머리를 맞대고 골몰하였다. 우리의 정치인들도 정파를 떠나서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들이 엔지지어로서 멋진 작업을 만들어내는 것을, 모두가 승자가 되어 과거를 극복하는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

<김진한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대학 방문학자·전 헌법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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