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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푸른 밤’이 그리운 계절이다. 떠나지는 못하고, 그립기에 그 인문지리를 복기한다. 먼저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남긴 글이 눈에 확 들어온다. 최익현은 세계사, 한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을사늑약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남의 나라 섬 대마도로 끌려가 숨졌다. 최익현은 제주도에 있을 때 한라산에 올라 제주도와 제주의 바다를 굽어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섬은 협소한 외딴섬이지만 큰 바다 속의 변치 않는 기둥과 같은 지형이고, 삼천리 우리나라 물길의 출입문이자 외적을 방어하는 관문이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질 만큼 정확한 표현이다. 제주도는 해저에서 폭발을 거듭하다 기둥처럼 솟은 섬이다. 이 기둥이 이룬 견고한 지형 앞에서 태풍의 사나운 기세도 달려오다가 막히곤 한다. 또한 제주도는 한반도의 물길과 태평양 물길이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해류의 흐름을 보거나 지도에서 한·중·일 사이에 자리한 그 위치를 확인하면 ‘관문’이라는 말이 과연 옳다 싶다. 그러면서도 “협소한 외딴섬”이라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지난 역사를 정직하게 표현한 말일 것이다. 오래도록 제주도는 말, 감귤, 해산물 등 엄청난 물산을 육지에 보냈지만 조선의 조정은 제주에서 물산만 받고 그저 유배지로나 활용했을 뿐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도 정치적 소외는 부인할 수 없다.
최익현에 앞서 18세기 조선 사람 신광수(申光洙·1712~1775)는 ‘잠녀가(潛女歌)’, 곧 해녀의 노래를 읊은 바 있다. 신광수는 특별검사쯤의 벼슬로 제주도를 다녀간 적이 있다. 난생처음 본 제주도를 여러 편의 시에 담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제주 여인의 물질을 이렇게 읊었다.
“탐라의 여자애들 자맥질도 잘해/ 열 살이면 벌써 여울에서 헤엄치네/ 풍습에 혼인 상대로 잠녀를 귀중히 여겨/ 잠녀 둔 부모들은 우리 딸은 먹고살 걱정이 없다고 자랑한다네.”
오늘날에도 제주 여성은 생활력 강하기로 유명한데, 이 시를 봐도 그 강한 생활력의 연원을 알 만하다.
그때도 제주 여성들은 땅 밟으면 호미 들고, 물에 들어가서는 다래끼 하나 끼고 씩씩하게 생활을 꾸렸다.
“호미 한 자루, 다래끼 하나에 뒤웅박 차고서/ 짧은 잠뱅이에 맨살이 드러나도 부끄러울 게 무어야/ 깊고 푸른 바다 서슴없이 곧장 뛰어드니/ 그 모습이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듯/ 육지 사람들 놀라건만/ 섬 사람들은 깔깔 웃는다.”
그 씩씩하고 활기 넘치는 모습이 육지에서 온 양반 남성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때 물질의 모습이 이랬다.
“푸른 물결 사이로/ 어느새 솟구쳐 올라/ 뒤웅박줄 얼른 끌어당겨/ 뒤웅박에 올라타고 휘파람 길게 불어/ 한 번에 숨 토해내니/ 그 소리 깊고 깊은 수궁까지/ 구슬피 울리겠네.”
수경과 잠수복 없는 것 빼면 해상에서 뒤웅박을 안고 쉬고, 휘파람 소리 나는 특수한 호흡을 하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 대목에 이르니 지금 내가 제주도 해녀의 집에 앉아, 전복과 해삼 등속을 잡아 돌아오는 해녀를 기다리는 기분이 된다. 그러면서도 신광수는 이렇게 씩씩한 노동의 이면을 생각했다.
“자맥질에 능한 여인은 물속 거의 백 척 아래까지 들어간다지만/ 가다 굶주린 고래의 밥이 되는지라.”
물속 백 척 아래라. 왜 그랬을까. 먹고살 만큼만으로 안되는 데에는 하루에도 몇 짐씩이나 팔도에 서울에 전복을 바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국 풍경에 취하고 제주 전복 맛에 취했다가 신광수는 번쩍 정신이 났다.
“잠녀여, 잠녀여!/ 너희 아무리 기꺼이 일한다 해도 나는 슬프구나!/ 어찌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내 뱃속을 채울까/ 두어라! 우리 같은 서생들은 해주산 청어 먹기도 어려워/ 그저 끼니마다 푸성귀면 됐지.”
신광수는 취했다가 멈추었다. 이국정서, 여인, 자맥질, 아득한 수궁의 상상력, 전복의 맛이 다가 아니었다. 사람 상해가며 맛만 따라 갈 수는 없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하늘만큼 파란 바다에서 건지는 제주의 진미도 진미지만, 문득 나도 신광수 따라 한 번 멈춘다. 그저 먹는 소리만 하기가 다시금 면구하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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