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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설레는 첫 사랑처럼 존재에 쿵 하고 다가오는 신간을 못 읽은 지도 참 오래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많은 번역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최첨단 마케팅 기법이 우리를 유혹하는데도 말이다. 신간 주문을 위해 킨들을 클릭할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심장의 기억이 다시 간절히 그립다.

나도 이제 아버지처럼 입만 열면 옛날 영화만 한 게 없다는 이야기로 투덜대는 나이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난 80년대의 그 묘한 기분이 요즘은 더 그립기만 하다. 정보경찰의 하이에나 같은 눈이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들어선 사회과학 서점에서 <노동의 새벽>을 집어들 때의 그 긴장과 떨림 말이다. 당시 이 시집의 출간은 잔혹한 압축성장의 시대에 잊혀진 ‘미생(未生)’들의 존재를 선언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어제 집에 배달된 30주년 기념판의 파란 표면에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글씨가 참 오랜만에 다시 온몸의 깨어남을 경험하게 했다.

왜 이 시집은 그토록 강렬하고 오랫동안 우리에게 다가오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이 작은 시집이 그 어떤 거창한 사회과학도 당시 예리하게 드러내지 못했던 시대의 본질에 대한 시적 진리를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하이데거는 시는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과 새로운 빛으로 드러낸다고 통찰한 바 있다(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당시 노동현장 속에 뿌리내린 박노해는 천민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생명의 찬란한 에너지가 어떻게 기름투성이 노동 기계로 전락하는지의 진리를 우리 앞에 충격적으로 드러내었다.

사실 이 책은 단지 근대 산업주의에 대한 노동의 반격만이 아니다. 다시 이 시집을 찬찬히 뜯어 읽으면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 ‘사랑’과 ‘생명’이란 단어의 마법에 주목하게 된다. 이 시집은 우리들의 “끝없는 생명력”과 “큰 사랑”이 어떻게 잔혹한 자본의 굴레 속에서 훼손되는지의 정치경제학을 펼쳐낸다. 하지만 그 절망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촐한 밥상’과 ‘평온한 저녁’에의 눈물 어린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아 더 가슴 아프다.

박노해 시인이 1984년 가리봉시장 얘기를 쓴 시집 <노동의 새벽> (출처 : 경향DB)


박노해의 그 지극히 소박한 꿈의 실현 가능성은 아직은 너무 멀리 있다. 이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의 대형 마트에 가면 전 세계의 진귀한 브랜드가 가득하다. 그리고 스마트폰 클릭 한 번이면 전 세계의 정보 보물이 실시간으로 손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풍요의 시대에 20대의 약동하는 생명 에너지는 제발 안정적으로 착취라도 해달라고 기원하지만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심지어 ‘일베’ 현상은 이 강한 생명의 잉여 에너지가 어떻게 순식간에 병리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잔인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린 정말 멀리 온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여전히 불의하고 불안하다.

1984년 당시 고졸 스물일곱살 ‘생산직 장그래’인 박 시인은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분노하면서 가족 및 동료들과의 조촐한 밥상을 꿈꾸었다. 그는 그 꿈을 위해 한때는 무기징역형을 감수했고 오늘은 백두대간과 남미 안데스 산맥을 누비며 새로운 길을 치열하게 찾아나가고 있다.

그가 그 당시 말하고자 했던 진리, 그리고 오늘날 자연에 대한 더 큰 각성과 영원한 첫 마음으로 무장한 채 나아가는 발걸음이 2015년 모든 미생들의 시대의 결로 확장되어 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마치 인터스텔라 영화에서 서재의 책이 흔들리며 우주의 중력 법칙의 표현인 사랑 에너지가 아버지로부터 새로운 세대에 전해지듯이 말이다. 테아르 샤르뎅이 오래전에 갈파한 것처럼 결국 우리는 모두 사랑의 끌어당김의 자장 속 빛나는 존재들이다.

이제 압축성장 시대가 세월호 비극으로 조종을 울린 지금, 조만간 그가 단행본으로 내놓기로 한 새로운 진리 선언을 나는 다시 가슴 설레며 기다린다. 인터스텔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새로운 길을 떠나는 주인공처럼 우리는 모두 이제 새로운 노동의 새벽, 인간의 새벽, 생명의 새벽을 향해 길을 떠나야 할 때이다.


안병진 | 경희사이버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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