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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제도와 관행들이 지속적으로 바뀌면서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시기마다 이전의 시기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부상하고, 언젠가는 그것도 새로운 흐름에 시대정신의 자리를 내주는 방식으로 변화와 발전을 계속한다. 이는 ‘정상’이다. 반대로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낡은 제도와 관행을 고집함으로써 해당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시도나 행태는 ‘비정상’이다.

최근 재벌가의 일부 자녀들이 신분제 사회의 귀족처럼 행동하는 데 대해 비난 여론이 쏟아졌는데, 이는 이런 ‘갑질’이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줄곧 ‘원칙과 신뢰’를 강조했다. 그래서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 이미지를 획득했다. 취임 후 박 대통령은 이를 기반으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제시했다. 이후 ‘비정상의 정상화’는 취임 첫해의 8·15 대통령 경축사에서 크게 강조되면서 최고의 국정과제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 참사에 대한 대국민 담화에서도 ‘비정상의 정상화’를 역설했다. 올해 1월2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제도와 규정을 정비하고 뿌리내리도록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1월28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3년간 추진되었던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선안을 백지화했다.

이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현행 건강보험 부과체계는 시대정신에 뒤처진 ‘비정상’의 요소 때문에 박 대통령이 강조한 대로 제도와 규정의 정비를 통해 ‘정상화’해야 함에도 박근혜 정권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현재 직장가입자는 근로소득에 대해서만 건강보험료를 낸다. 게다가 금융소득, 임대소득, 연금소득 등의 종합소득이 연간 4000만원 미만이거나 재산이 과세표준으로 9억원 미만이면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가 되어 건강보험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이는 세금이나 건강보험료는 근로소득뿐만 아니라 부담 능력에 따라 부과하는 게 옳다는 최근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조속히 ‘정상화’해야 한다.

1977년 7월 도입된 법정의료보험제도는 500인 이상 사업장의 근로자와 피부양자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당시 의료보험조합 수는 521개였고, 전체 인구의 8.8%를 포괄했다. 독일 비스마르크 방식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 의료보험료는 총체적 부담능력이 아니라 가입자의 근로소득에만 정률로 부과되었다. 사업장 동료끼리 서로 돕는다는 직장의료보험의 조합주의 논리에 따라 가입자의 근로소득 외의 소득이나 피부양자의 부담능력은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이는 당대의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게 아니었다. 그때 시대적 요구에 어긋났던 것은 대기업 근로자 외의 대다수 국민이 의료보험제도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전국민의료보험이 시대정신으로 등장했다. 비록 조합주의 방식이지만 1988년 1월 농어촌, 그리고 1989년 7월 도시 주민들에게 법정의료보험이 적용되었다. 이후 10년에 걸친 의료보험 통합일원화 투쟁 끝에 2000년 7월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과 사회연대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진 현재의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최근 수년간의 시대정신은 국민건강보험이 실질적 부담능력에 따른 공정한 부과체계로 개편되고 ‘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병원비가 해결되도록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용납되었지만 지금은 시대정신에 뒤처진 낡은 제도들은 ‘정상화’해야 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4년 3월 7일 (출처 : 경향DB)


정상화의 과제는 국민건강보험뿐만 아니라 경제와 복지의 전반에 걸쳐 있다. 지금 ‘비정상’은 시장에 대한 맹신이고, 시장의 과잉과 실패를 초래한 시장만능주의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국민건강보험의 부과체계 개혁과 보험재정 확보 등의 공적 의료보장제도 강화 대신에 의료영리화를 추진했고, 복지국가 대선공약을 파기함으로써 원칙과 신뢰를 저버렸다.

시장만능의 줄·푸·세 노선을 고집함으로써 양극화와 민생불안을 심화시켰다. 이는 ‘비정상의 고착화’로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것이다. ‘국민 불행’이 더 이상 깊어져선 안 된다.


이상이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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