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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만세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출범 백주년을 맞았던 지난 3월과 4월, 우리는 백년의 감회에 젖었습니다. 민주공화제 백년의 나라에서 백년시민이 된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의 ‘공화적 협력’의 현실을 떠올렸습니다. 민주공화제의 헌법질서 아래 우리는 헌법가치를 얼마나 공유하며, ‘공화적 협력’에 얼마나 충실한가? 정부는? 국회는? 정당은? 노와 사는? 언론과 방송은? 나아가 시민사회와 개인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미래백년을 위한 협력의 꿈을 제대로 꾸기도 전에 일본의 무역도발이 ‘국난’의 기억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위안부문제와 징용배상판결에 대한 아베의 불만과, 군국주의의 꿈을 접지 못한 아베의 야욕이 마침내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한국 제외’라는 횡포로 속을 드러냈습니다. 전범의 유전자가 일본의 국가지도부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확인시킨 겁니다. 우리는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일본의 무역행패나 그로 인한 경제위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숱한 국난극복의 역사와 함께 가깝게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하나로 뭉쳐 이겨낸 위대한 협력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우리 내부의 분열과 협력하지 않는 대한민국입니다. 1%대, 0%대의 경제성장률로 가더라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협력의 대오로 견딘다는 각오라면 이 터무니없는 경제폭력은 충분히 이겨낼뿐더러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백년의 기회가 더 빨리 열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국가재정 여력이 어느 때보다 튼튼합니다. 정부는 재정 여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경제체질을 바꾸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소재, 부품, 장비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1조원을 투입한다고도 했습니다. 어쩌면 아주 못된 이웃이 우리의 백년미래를 다질 수 있는 밖으로부터의 자극을 주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엄중한 현실 앞에서 우리 내부의 국가적 협력이 긴박하고도 절실하며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국가적 협력과 결속에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자유시장경제 기반의 사회에서 협력의 핵심은 경제주체들에 있습니다. 탐욕과 야만의 이빨을 번득이는 외세 앞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계와 경영계의 협력만이 나라를 지킬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무기입니다. 무엇보다 ‘협력’을 위한 ‘사회적 대화’의 문이 크고도 다양하게 열려야 합니다. 나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대화가 노동기반과 노동존중사회를 실현하는 ‘신노동운동’의 실천양식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공동체의 공공적 과제를 더 많이 떠올리며 구래의 운동방식을 과감히 뛰어넘어야 합니다. 기업 또한 시장가치를 넘어 인간가치와 공공가치를 더 많이 추구하는 훨씬 더 열린 마음으로 자기 몫을 좀 더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협력적 대화’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절박하고도 위태로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협력적 대화운동이야말로 신노동운동이자 ‘신기업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의 의미 있는 메시지가 눈에 띕니다. 내년 최저임금 2.87% 인상에 대한 노동계와 일반시민 간의 너무 다른 인식차이를 보며 그는 “우리는 대중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김 위원장은 “한국노총은 대한민국의 노동자와 국민들에게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설명해 왔을까?”라고 묻습니다.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소통에 대한 강한 열망이 엿보입니다. 김 위원장이 바로 ‘신노동운동’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으로 읽힙니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 또한 똑같은 문제로 더 깊이 더 오래 고뇌하고 있을 겁니다.

노동운동의 오랜 통념은 산업화시대 조직노동자들이 계급적 주체로 계급이익을 추구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존 노동운동도 대기업 정규직 거대노조를 기반으로 정부나 자본 측과 대결적 관계를 유지하며 단체협상이나 직접투쟁의 제한된 활동방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노동단체들은 대부분 덜 개방적이거나 비공개적이어서 시민사회와의 소통에 취약했고, 사회적 대화는 정부주도의 단일 기구를 통해 가동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같은 노동운동은 이제 그 시효가 만료되어 ‘구노동운동’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산업화시대가 탈산업 디지털 시대로 바뀜에 따라 구노동운동 또한 패러다임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신노동운동은 자본 측과 적대적이거나 대결적 관계를 넘어 노동의 보편성과 공공성을 기반으로 하는 협력적 관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신노동운동의 주체는 노동계급을 넘어서는 ‘노동시민’이며, 대기업 정규노동자를 넘어 비정규직 노동자와 점점 더 확대되는 플랫폼노동자와 같은 특수형태의 노동자들이 새로운 구심을 만듭니다. 노동영역 자체가 보편적 질서로 작동하고, 노동권익을 넘어 사회적이고 공공적 문제 해결을 주도하는 ‘노동공공성’이야말로 신노동운동의 핵심쟁점입니다. 신노동운동은 공익재단과 같은 다양한 제도적 기반을 갖추어 제도적 수단을 통한 공개적 소통을 확장해야 합니다. 신노동운동으로서의 사회적 대화운동이 노와 사와 정부와 시민사회가 서로를 더 개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수준의 신뢰를 쌓는 계기를 만들어야 협력하는 대한민국이 가능합니다.

대한민국 새로운 백년의 미래가 다소 더디게 그려지는 와중에 일본의 무도한 겁박이 들이닥쳤습니다. 우리는 이 치졸한 반칙과 행패를 오히려 우리의 경제와 정치와 사회의 체질을 좀 더 빠르게 바꾸어 새로운 백년의 미래를 앞당기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신노동운동을 추구하는 사회적 대화운동이 흔들리지 않는 국가적 협력과 결속의 무기로 다듬어져야 합니다. 국가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협력경제의 패러다임’에 앞장서는 신기업운동이 이에 화답해야 합니다. 고약한 전범국가의 반성 없는 행패에 굳건히 대응함으로써 협력경제와 협력사회의 근육을 키우는 데 사회적 대화운동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더없이 엄중한 국가위기의 시기에 반협력적 이탈과 반공화적 이반을 감시하고 경고하는 것도 신노동운동의 몫입니다.

<조대엽 | 고려대 노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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