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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초등학생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에 오면서 가졌던 가장 큰 걱정은 안전 문제였다. 미국에 온 이후 몇 차례나 접한 어린이 총기 사망사고 뉴스가 이런 걱정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아이 수백명을 속절없이 바닷속에 묻어버린 세월호 참사 이후, 내 생각도 바뀌고, 자녀를 키우는 주위의 교포와 유학생들의 생각도 달라진 듯하다. 여기서는 적어도 저렇게 허망하게 아이들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종 여객기 위치를 찾기 위해 주술사를 동원했다는 말레이시아 소식과 한국의 세월호 참사 소식이 뉴스 헤드라인으로 나란히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부끄럽기도 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참사 이후의 상황이었다. 말만 요란했지,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은 늘 그랬던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자식의 억울한 죽음에 곡기를 끊은 부모들을 조롱하며 망언을 퍼붓고, 그 앞에서 먹자판을 벌이는 아귀 같은 꼴을 보면서, 주위 사람 모두 진저리를 쳤다. 저런 곳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는 것이다. 어느새 한국은 총기사고로 매년 100명 이상의 아이들이 사망하는 미국 사람들조차 아이 키우기 꺼리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미국 부모들의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이의 스포츠 활동 뒤치다꺼리다. 미국 아이들의 스포츠 활동은 극성스러울 정도다. 학교 일과 중에도 그렇고, 방과 후에도 야구, 축구, 풋볼, 치어리딩 등의 클럽 활동에 몰두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놀이터도 아이들 뛰노는 소리로 항상 시끌시끌하다.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아이들의 지나친 스포츠 활동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듯하다.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미국이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스포츠 활동에 대한 지나친 몰입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시종일관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학업성취는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인 건전한 시민 양성을 포기한 대가이다.
‘건전한 시민’을 내 나름대로 정의하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강한 시민’이다. 그런데 한국 교육은 학생의 몸과 마음의 건강과는 상극이다. 교육을 통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압력밥솥 같은 교육 때문에 몸과 마음이 병들고 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타인과 소통하며 협력하고 공감하는 것 역시 맹탕이다. 팀워크와 협력,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는 입시 면접 때 써먹어야 할 암기용 키워드에 불과하다. 한 학생이 선한 의지로 친구에게 자신의 기회를 양보할라치면, 당장 부모로부터 “너는 왜 이렇게 물러터졌냐!”고 타박받기 십상이다.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시샘하고, 타인의 불행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남 몰래 즐기며,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짓밟는 심성은 이렇게 해서 길러진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만연한 학교폭력과 왕따, 세계 최고의 청소년 자살률, 최근 20대 초반의 멀쩡하던 청년들이 벌인 끔찍한 군대폭력이다. 우리 아이들을 실은 세월호는 이미 4월16일 이전에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한 시민으로 자랄 아이들을 위해.. (출처 : 경향DB)
건강과 행복, 그리고 더불어 사는 마음을 희생하며 얻은 학업성취는 금방 허물어질 모래성이다. 헛똑똑이만 잔뜩 양산하는 꼴이다.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밑천이라면서, 우리는 밑천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걸 까먹는 짓만 골라 하고 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사라진 나라에 더 나은 미래는 없다. 국제학업성취도 순위를 좀 까먹더라도, 교실과 학원 밖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억지로라도 친구들과 뒤엉켜 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해진다. 타인과도 더불어 살아갈 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월호 사고 자체보다 사람들을 더 진저리치게 만든 인면수심의 말과 행동도 사라지게 된다.
이진석 | 서울의대 교수·미 텍사스 보건대학원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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