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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가는 날, 남자는 강아지를 꼭 껴안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잠시라도 한눈팔다간 버리고 가기 때문이란다. 웃자는 농담 같은데 농담 같지가 않다. 실제로 아버지는 우선순위에서 강아지에게 밀린다. 3인1견 가족의 가장인 나의 실제상황이다.

가장인 아버지가 언젠가부터 ‘물건’으로 불리더니 이제는 버릴 수도 있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또 불통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엄하고 무섭다. 그러니 아이들도 할 이야기가 있으면 엄마를 찾는다. 아버지와는 점점 더 멀어진다.

지하철에 함께 탄 엄마와 딸의 모습을 보자.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완전 친구다. 엄마와 아들? 엄마는 다소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말을 거는데 좀 무뚝뚝해 보이긴 해도 아들도 이야기를 잘한다. 가끔 웃기도 한다.

그럼 아빠와 딸은? 딸은 꽤 열심히 말을 하는데 아버지의 말은 “응” “아니” “그랬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장이라 해봐야 대부분 단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말이 없다.

원래 그랬다. 오십 줄에 접어든 친구들 이야기는 한결같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고집은 황소 힘줄에 툭 하면 짜증이고 파리채 찾다 없으면 화를 내는 통에 온 가족이 미치겠다고 한다. 나 역시 아버지와 이야기할 때 거대한 벽과 마주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아버지들’은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시절 이 나라는 거대한 병영사회였고 이들이 다닌 직장은 사실상 ‘민간 군대’였다. 이들에겐 가족 역시 상명하복의 조직이었다. 이들에게 가족이란 먹여 살려야 할 대상, 즉 식구(食口)였다. 먹이는 것이 곧 그들의 임무였고 계속 먹이기 위해 회사를 더 열심히 다녀야 했다. 직장에서 쓰디쓴 모욕을 당하면 술을 퍼마셨고 집에 와서 소리도 좀 질렀다. 가끔 가족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상전에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해봤지만 가족에게 “미안해”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출처 : 경향DB)


그들은 회사에 충성하며 가족과 멀어져갔다. 그런데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가야 하는 날. 더 일할 수 있는데 나가라니. 상실감, 배신감이 짓누르고 회한이 몰려온다. 그러나 가족에겐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가장이니까. 퇴직한 그들이 가정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가족과의 소통이다. 그들은 잘하고 싶었다. 아직 쓸모 있는 존재임을 알리고 싶었다. 옛날엔 신경 쓰지도 않던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온다. 냉장고 정리도, 다용도실 세탁기 위치도 효율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말도 하고 바꾸기도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잔소리 좀 그만하라며 원위치시켜버리고 가버린다. 자식들에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물어보지만 시큰둥하다. 대답은 단답형이다.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섭섭했다. 나는 평생을 너희들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지금 나를 무시하나? 내가 귀찮은 건가? 그런데 지내다 보니 조금 이상하다. 나한텐 말도 잘 걸지 않으면서 자기들끼리는 이야길 하는 것 같다. 아이들 어릴 때 아내가 공부하라고 닦달하면 좀 쉬게 해주라고 편들어준 건 나였는데 왜 엄마랑 더 친하지? 나른한 오후 낮잠을 자다가 자식과 아내가 웃는 소리에 깬다. 잠결에 밀려오는 외로움. 그리고 배신감. 군중 속의 고독보다 더 힘든 게 아버지의 가족 속 고독이 아닐까.

대화가 중요한 건 알지만 나도 중3 자식과의 대화가 때로는 부담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전화를 건다. “진우 오늘 학교 재밌었어?” “네.”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네.” “저녁 먹었어?” “네.” “(잠시 생각하다가) 진우야. 아빠가 묻는 말에 네, 네 하지만 말고 진우가 진우 이야길 해도 좋잖아?” “(길게) 네~.”

그래도 포기는 없다. ‘브루쓰’보다 내가 더 사랑받는 그날이 올 때까지!


정희준 | 동아대 교수·스포츠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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